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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는 투자의 역사 이집트와 유럽, 그리스 독립전쟁에 개입하다

기고: 전략팀 권형우 선임매니저

안녕하세요. 벌써 6월, 2026년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운 날이 많은 역대급 무더위가 찾아올 것이라 합니다. 항상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 올여름도 무탈하고 시원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난 글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요청을 받아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그리스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어서 관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독립운동 진압에 참전한 이집트

무함마드 알리는 자신의 아들 이브라힘 알리를 지휘관으로 삼아 1825년, 1만 7천여 명의 군대를 그리스로 파견합니다. 일찍부터 이브라힘 알리는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사우드 가문이 세운 디리야 토후국을 멸망시키는 등 뛰어난 군대를 지니고 있었기에,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는 그에게 그리스 독립운동 진압을 일임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그리스 독립군은 지휘체계를 두고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민병대 중심의 그리스 독립군들은 일단 봉기 자체는 성공했으나 이후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1821년 그리스 독립세력은 제1차 국민회의를 열고 독립을 선언한 뒤 1822년 그리스 헌법 제정, 1822년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가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해 그리스 제1공화국을 개국했습니다. 하지만 공화국 설립에 소외된 동부 지역의 아레이오스 파요스가 공화국 의회에 반발하고, 1823년에는 테오도르스 콜로코트로니스가 자신의 총사령관직 해임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를 내쫓는 등 혼란이 계속됐습니다. 영국의 도움으로 마브로코르다토스는 다시 복귀했으나 이후에도 정치적, 군사적 혼란이 계속됐습니다.

1825년 7월, 이브라힘 파샤는 함대를 이끌고 크레타를 점령, 이후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일단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메트니에 상륙한 이브라힘 파샤는 나바리노, 메솔롱기를 점령하고 뒤이어 대도시 아테네까지 함락하며 전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이브라힘 파샤는 항복하지 않으면 전 국토를 불바다로 만들고 파괴하겠다 엄포를 놓았고 실제로 아르고스 등 도시를 방화로 파괴하는 등 강압적인 진압을 개시했습니다.

특히 메솔롱기 공방 시 이집트 군은 항전하는 그리스 독립세력이 도시에서 자폭까지 각오할 정도로 강경하게 저항하자 잔혹하게 진압했는데, 최후에 도시를 탈출하던 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팔고 3천 명의 사망자의 머리를 베어 성벽에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의 강경한 진압은 유럽 지역에 충격을 주었고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루크루아는 <메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무력 개입에 나선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실 빈 체제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고 있던 유럽에서는 딱히 그리스 독립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1823년 젊은 귀족이자 당대 최고의 낭만시인으로 유럽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조지 고든 바이런이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를 외치며 군자금을 조달해 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규탄만 할 뿐 군대를 파병하거나 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이런의 호소처럼 유럽인들은 그리스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은 가지고 있었는데 이집트 군의 메솔롱기 점령 등 전쟁의 참혹함이 퍼지자 유럽 각국의 정부도 여론의 악화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일단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1827년 7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자치를 인정하고 만약 조치가 이행되지 않으면 유럽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는 런던 협약을 맺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에 자치국을 세워 자치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최종적인 종주권은 보장받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는 그리스 정벌군을 지원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함대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 역시 일단 마지못해 런던 협약에 대해 동의는 했으나 이후 최종 인준은 거부했고 결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무력 개입에 나서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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