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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제 제법 봄 날씨가 완연해진 4월입니다. 이제 봄꽃 소식도 제법 들립니다. 일교차가 커지는 만큼 감기 조심하시고 이번 4월도 힘차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독립을 약한 뜨거운 불길
지난 글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왈라키아로 남진한 부분에 대해 다뤘습니다. 당시 왈라키아는 그리스 독립을 꾀하던 필라키 에테리아의 미하이 수추 2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미하이 수추 2세는 왈라키아에서 입실란티스의 군대에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고, 입실란티스는 격문을 발표하며 모든 그리스인과 기독교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그리스의 독립을 꾀하자고 촉구했습니다.
격문에 놀란 오스만 제국은 가혹한 진압으로 맞섰습니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였던 그레고리오 5세는 입실란티스와 미하이 수추 2세를 파문하고 독립운동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으나, 술탄이었던 마후무트 2세에게 책임을 추궁당하고 처형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레고리오 5세 외에도 일부 주교들이 처형을 당했고 종교지도자의 처형에 분노한 그리스인들의 저항도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미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반란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총대주교의 처형은 이 반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정교회에 대한 교회 공격과 학살, 일부 주민들의 노예화로 반란의 의지를 꺾고자 했지만 독립의 불길을 계속 일어났습니다. 유럽 곳곳에서도 오스만이 정교회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세가 일었고, 일부 국가는 대사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빈 체제에 대한 수호 의지가 그리스 독립 의지를 꺾다
민중들의 열망과 후원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국가들은 그리스 독립에 대해 떨떠름했습니다. 마침 나폴레옹이 패배해 유럽에는 소위 빈 체제(1814~1848)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빈 체제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퍼져 나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절대왕정과 기존 체제를 최대한 유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독립운동에 대해 미덥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입실란티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를 오랫동안 후원해왔던 러시아 제국은 지원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포기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입실란티스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도 초창기 패배를 설욕하면서 그리스 독립군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1821년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입실란티스는 큰 피해를 입었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합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다르게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의 평화를 깨뜨리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입실란티스를 감금했습니다. 그나마 그리스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니콜라이 1세 덕분에 입실란티스는 1827년 풀려났으나 1년만에 그리스 빈에서 사망합니다.
끝나지 않은 그리스 독립운동
입실란티스는 그가 주적으로 삼았던 오스만 제국이 아닌 유럽에서 빈 체제를 수호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최후를 맞았으나 그리스 독립의 불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계속 반란을 일으켜 결국 그리스 본토, 펠레폰네소스와 크레타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고 독립전쟁은 이제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입실란티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된 것이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운동를 진압하기 어렵다 생각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외부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휘두르던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