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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들과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자연스럽게 화두는 '돈'과 '노후'로 흘러갔습니다. 한 친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습니다.
"야, 요즘 세상에 얼마쯤 있어야 진짜 부자냐?"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강남에 똘똘한 아파트 한 채는 쥐고 있어야지"
"아니야, 요즘 물가 생각하면 현금 자산만 최소 100억 원은 있어야 부자 소리 들어."
강남 아파트와 100억 원, 그 부러움과 자조 사이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테이블 위에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부동산을 가진 이들, 혹은 감히 만져보기도 힘든 거액을 가진 이들에 대한 부러움은 이내 자조 섞인 한탄으로 변했습니다. "우린 평생 벌어도 강남 진입은커녕 그 반의반도 못 만져보겠네"라는 말과 함께, 은연중에 부자들을 향한 이유 없는 비판과 시기 어린 목소리도 오고 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 보았습니다. 은퇴 후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생활비를 조달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가슴 한구석이 씁쓸했습니다. '우리가 말한 그 기준이 정말 은퇴를 눈앞에 두거나, 이미 은퇴를 맞이한 우리 세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정답일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자산가와 행복한 은퇴자
문득 몇 해 전 은퇴한 선배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그 선배는 소위 말하는 '강남의 수십억 원짜리 아파트'를 한 채 보유한, 남들이 보기엔 번듯한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 그의 삶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생 벌어 아파트 한 채에 모든 자산이 묶여버린 탓에,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부족해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매달 나오는 관리비와 세금은 무거운 짐이었고,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 잔, 술 한 잔 사는 것조차 극도로 아까워하며 점차 모임에서 발길을 끊었습니다. 수십억 원짜리 집에 살면서도 매달 가계부를 보며 한숨을 쉬는 삶, 과연 이를 '부자의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반면, 지방의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매달 은퇴 전 월급만큼의 연금이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다른 선배의 얼굴은 늘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는 큰돈을 쌓아두지 않았음에도 "죽을 때까지 이 돈은 매달 나오니까"라며 마음의 여유를 부렸습니다. 주말이면 아내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친구들에게 기분 좋게 밥 한 끼를 살 줄 아는 통 큰 신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며 나는 깨달았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의 부자와, 은퇴한 사람의 부자 개념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은퇴자에게 진정한 부자란, 쌓아둔 자산의 총액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부족함 없이 쓸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 연금이 주는 자유
젊은 시절의 부자는 '자산의 규모'로 평가받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벌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리스크를 감당할 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퇴자에게 100억 원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무력합니다. 그것이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현금 흐름(Cash Flow)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자산을 지키기 위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만 더할 뿐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바라보는 '포스트 은퇴 시대'에는 자산이 언제 고갈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가장 큰 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은퇴자들 사이에서 진짜 부자는 다름 아닌 '연금 부자'입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그리고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하는 주택연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매달 안정적인 수입을 만들어낸 사람들 말입니다.
매달 통장에 꽂히는 300만 원, 500만 원의 연금은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퇴자의 자존감이자,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당당함이며, 노후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자유'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든,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든 상관없이 매달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든든한 지원군이야말로 은퇴자를 가장 부자답게 만들어줍니다.
시기와 자조를 넘어, 나만의 '황금 거위'를 키워야 할 때
다시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가 강남 아파트를 가진 이들을 보며 자조하고 비판했던 이유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은퇴의 기준을 '연금'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향한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을 돌아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수십억 원의 자산가가 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노후에 매달 수백만 원의 현금 흐름을 만드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의 꾸준한 준비와 계획으로 충분히 도달 가능한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타인의 100억 원을 부러워하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내 통장에 매달 황금 알을 낳아 줄 '연금'이라는 황금 거위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해야 합니다. 화려한 자산의 껍데기보다 내실 있는 흐름을 중시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은퇴자 천국으로 가는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새로운 부자의 기준이 아닐까요?
내일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함과 반성을 담아 이렇게 말해보려 합니다.
"친구야, 우리 강남 아파트 부러워하지 말고, 매달 든든하게 나오는 연금 부자가 되는 길을 같이 고민해 보자고. 진짜 웃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