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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프랑스 파리에서 교환학생 생활 중인 미래에셋 장학생 특파원 김솔입니다. 지난 9월, 프랑스 전역이 거대한 함성으로 흔들렸습니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나서며 "멈춰라, 이제는 우리 차례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시위는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장기화된 재정 위기와 복지 체계의 한계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습니다.
시위의 시작은 예상보다 조용했습니다. 2025년 중반, SNS를 중심으로 '블로콩 투(Bloquons tout, 모두 멈추자)'라는 해시태그가 번지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상과 노동을 멈추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9월 10일에는 경찰 추산 약 20만 명이 참여한 봉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어 9월 18일, 프랑스의 주요 노조 8곳이 총파업을 선언하며 교통, 에너지, 교육 등 핵심 산업이 멈춰섰습니다. 당일 파리는 도심 곳곳이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로 마비되었고, 메트로 운행은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시민들은 피켓을 들고 "공공서비스를 지켜라", "복지의 책임을 시민에게 돌리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시위의 불씨는 2026년 프랑스 정부 예산안이었습니다. 정부는 재정 적자 축소를 위해 공공 지출 동결과 복지 혜택 축소를 발표했으며, 세입 확대를 위해 일부 공휴일(전승기념일·부활절 등) 폐지를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미 높은 세금 부담 속에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이 조치는 '복지의 후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노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긴축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고, 시민들은 "경제를 살린다며 서민의 삶을 빼앗는다"고 분노했습니다. 한편, 마크롱 정부는 부유세 개편과 법인세 인하를 단행하며 기업 투자 유치를 노렸으나, 프랑스 회계법원은 "감세로 인한 세수 손실이 600억 유로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수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폭발시킨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긴축 논란은 정치적 위기로 번졌습니다. 2026년 예산안에 대한 신임 투표에서 바이루 총리 내각은 304표의 반대표로 부결되며 9개월 만에 무너졌습니다. 이는 1958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정부가 자진 제출한 신임 투표가 부결된 사상 첫 사례였습니다. 앞서 미셸 바르니에 전 총리 또한 예산 반발로 불신임을 받고 3개월 만에 물러난 바 있어, 프랑스 정국은 사실상 '내각 붕괴의 도미노' 상황에 놓였습니다. 새로 임명된 세바스티앵 르고루니 총리는 취임 직후 공휴일 축소안을 철회하고, 전직 총리 특혜 예산을 삭감하는 등 민심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현재 프랑스 재정은 IMF가 '위험 신호'라고 언급할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2025년 기준 국가 부채는 3조 4천억 유로,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14.1%로 유럽에서 그리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GDP의 57%가 정부 지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유로존 평균보다 10%p 이상 높습니다. 그중에서도 복지·사회보장 지출이 전체의 23.4%를 차지해, 고령화와 의료비 부담이 재정 악화의 핵심 요인으로 꼽힙니다. 한 경제학자는 "프랑스의 복지는 더 이상 사회적 연대가 아니라 재정적 모순이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랑스의 가장 큰 재정 부담은 연금입니다. 1982년, 미테랑 대통령이 연금 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춘 이후 재정 구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습니다. 1960년, 연금 수급자 1명을 4명의 근로자가 부담하던 구조는 2022년 1.7명으로 줄었으며, 2040년에는 1.5명까지 감소할 전망입니다. 게다가 프랑스는 은퇴자의 평균 소득이 현역 근로자의 평균을 초과하는 유일한 OECD 주요국입니다. 즉, 젊은 세대가 낸 세금이 고령 세대의 복지로 전가되는 '역전된 세대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프랑스 정치권은 진보, 보수, 중도 어느 세력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정치적 교착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좌파는 부자 감세 철회를, 중도는 복지 개혁을, 극우는 이민자 복지 축소를 주장하며 갈등이 극심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시민들은 점점 더 피로해지고 있습니다. 복지를 줄이면 사회적 불안, 복지를 유지하면 재정 파탄이 다가오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입니다. 이는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연금 개혁의 부담을 안고 있는 한국 사회 역시 언젠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설 수 있습니다.
파리의 거리를 가득 메운 함성은 단순히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복지를 누리되, 그 대가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시대의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의 프랑스는 우리에게도 거울이 됩니다. 복지와 성장, 세대와 세대 사이의 균형이라는 과제는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그리고 그때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함을 이번 현장은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