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혁명에 대해 설명하기 이전에 체코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결합되어 1918년부터 1992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형태로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1918년 마사리크 대통령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입니다. 제1공화국은 엔지니어링, 자동차, 군수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1인당 국민 소득이 세계 8위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에 성공하면서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뮌헨회담에서 독일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 협상을 통해 수데텐 지방은 독일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에는 정작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의견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뮌헨회담 이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과 루테니아를 헝가리에 넘겨주고, 폴란드에 테센 지방마저 내어주며 다음과 같이 영토가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부터는 공산당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1990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공산주의 정권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알렉산더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 아래 촉발된 시위가 있었지만, 이는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진압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 정권은 1989년 일어난 비폭력 혁명인 벨벳혁명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도화선이 되면서, 11월 17일에 청년사회주의연맹 소속의 학생들이 프라하에서 반나치 시위를 벌이다 처형된 학생들의 50주년 추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행진을 시작하면서 일반 시민들도 합류하여 약 1,500명이었던 사람들이 55,000명이 넘어가게 되었고, 추모식이 민주화 시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민주화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불어나는 인원과 점점 강해지는 구호로 경찰들은 강경 진압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강경 진압은 시위에 불을 붙였고,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져 3일이 지난 20일에는 50만 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위를 주도할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며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중심이 된 시민포럼이라는 조직이 결정되었고, 슬로바키아에서는 이에 준하는 조직인 반폭력대중이 결성되었습니다. 이에 정통성 상실을 인식한 공산당 지도부는 온건파인 우르바넥을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하고 우르바넥이 시민포럼 등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공산당의 독재 폐지와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25일에서 27일 사이에는 8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27일에는 2시간가량의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우르바넥이 사임하고 뒤를 이은 아다메츠와 시민포럼 간의 원탁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협상 끝에 공산당은 다시 공산계가 총리를 맡는 조건으로 비공산계가 다수를 구성하는 내각안을 승인하였으며, 전면적인 정치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삭은 이를 승인하고 12월 10일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습니다.
이후 12월 28일에는 프라하의 봄의 주역이었던 둡체크가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2월 29일에는 자유 선거를 통해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벨벳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벨벳혁명이라는 말은 하벨의 연설에서 비롯된 말로, 벨벳은 조용한, 평화로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년 후에는 단일 정부 구성 협의에 실패하면서 슬로바키아 의회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에서 탈퇴할 것을 결정하고, 1993년 1월 1일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지는 벨벳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체코슬로바키아는 벨벳혁명을 통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벨벳혁명을 계기로 체코 경제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체코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 말까지는 외연적 경제성장을 추진해 경제가 안정되었지만, 1980년대 들어 경제성장률이 둔화되었습니다. 이는 공산화 이후 노동과 자원 투입에 치중하고 합리성과 생산성 향상을 등한시한 결과였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1990년 체제전환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어떠한 개혁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체코슬로바키아는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경제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체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생산 기반과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적인 이동과 정보의 자유 이동이 일부 허용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오스트리아, 독일과 경제, 생활수준을 비교하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기준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DP는 오스트리아, 독일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체제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198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DP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절반으로 추락했습니다.
벨벳혁명 이후 체코는 바츨라프 클라우스 총리의 주도로 경제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경제 개혁을 통해 체코는 계획 경제 체제에서 자유시장중심 경제로 전환되었습니다. 1989년에 시장을 개방한 후 갑작스러운 체제변화로 인해 1990년부터 1993년 사이에는 –23%의 경제성장률을 보이기도 했지만, 1994년부터는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제조업, 서비스업 분야의 성장과 국내 기업, 민간 기업의 발전이 촉진되었습니다.
1997년 이후에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적 불황으로 경제성장률이 저조해졌지만, 1998년 밀로시 제만 행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해외 자본 유치 등의 적극적인 경제개혁 정책을 펼치고 세계경제가 호전됨에 따라 1999년부터는 다시 경제가 회복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면서 4%에서 7%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체코의 EU 가입은 유럽 국가와의 경제적 통합을 이루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GDP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과거 체코의 1인당 GDP는 1990년에는 3,000달러대에 머물렀지만 성장을 통해 2018년 체코의 1인당 GDP는 23,078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 벨벳혁명이라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체코의 경제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혁명 이후 경제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제적 성장을 나타낸 체코를 보니 만약 통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경제는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메인이미지 출처: ⓒ Josef Šrámek ml.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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