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올라간 때부터 미국 국채를 더 빠른 속도로 매각해 왔다. 미국 국채 매각 대금으로 중국 국채를 매입하면 한편으로 위안화 약세를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부채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경제정책 방향을 미국 금융위기에 준하는 양적완화(QE)를 추진키로 확정한 것을 고려하면 위안화 절하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2022년 10월 제20차 공산당 대회 이후 20차례가 넘는 금융완화 조치가 경기부양 효과가 없는 데도 한 단계 더 높여 QE를 결정했느냐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10년물 국채금리는 2% 밑으로 떨어져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있다. '늪'으로 비유되는 이 함정에서는 금융완화 정도가 높을수록 부작용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트럼프 2기에 중국 업무를 총괄할 하워드 루트닉 상무장관 지명자 등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오히려 위안화 약세를 더 빨리 유도해 고관세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보고 2차 대응 수단으로 '1988년 종합무역법'을 손질하고 있다. '옴니버스'가 붙여진 이 법에서는 특정국이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절하시키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이 대응하는 방법을 보면 함무라비 탈레오 법칙(lex talions) 식이다. 오히려 트럼프 집권 1기 때보다 더 철저하게 이 원칙을 취하고 있다. 중국 중심의 '팍스 시니카(중국몽)' 구상을 꿈꾸고 있는 시진핑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일단 밀리면 중국몽 실현은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다.
트럼프 집권 2기 미·중 간 경제패권 마찰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한다. 전자는 트럼프 압력에 시진핑 굴복이라는 '디리스킹'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단 승기를 잡으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을 고려하면 중국과의 무역 협상을 미국의 의도대로 주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후자는 현 상황에서 크게 변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세계 경제 패권 다툼은 그 자체가 '타결' 혹은 '합의'와는 거리가 먼 디커플링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국 간 경제발전단계와 수출입 구조도 워낙 달라 어떤 방식을 동원하더라도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줄어들기는 어렵다는 근거도 작용하고 있다.
양 극단론 속에 절충점은 없는 지 여부다. 집권 1기 때 경험했듯이 '트럼프 리스크'가 장기간 지속되면 피로 증후가 누적되면서 4년 후 다시 한번 대통령직을 꿈꾸는 트럼프에게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중국도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커지면서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가뜩이나 약해진 시진핑 주석의 리더십이 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동안 잠복했던 '제2 플라자 합의' 논쟁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플라자 합의란 1980년대 초 국제수지 불균형의 주범인 미국과 일본 간에 엔화 강세를 유도하기 위한 합의를 말한다. 10년 동안 지속됐던 플라자 체제에서 엔·달러 환율은 240엔대에서 79엔대로 폭락했다.
위안화 평가절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학수고대해 왔던 과제였다. 집권 1기 때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약속을 해온 상태에서 지키지 못해 트럼프가 연임에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다. 집권 2기 들어서도 대중국 무역적자가 줄어들지 않으면 당장 2년 후에 치러질 중간선거부터 공화당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도 위안화 절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편입,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을 통해 위안화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 중심의 팍스 시니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전통화로서 위안화 기능이 높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관건은 트럼프와 시진핑 정부가 달러화 약세와 위안화 절상 폭을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성장률이 목표선인 5% 떨어진 상황에서 대폭적인 위안화 절상은 중국부터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위안화 약세를 과도하게 유도하다간 트럼프 정부와 무역마찰이 더 심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미국도 같은 입장이다. 집권 2기 들어 무역적자 축소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대폭적인 달러화 약세 용인은 '득'보다는 '실'이 크다. 미국의 수출입 구조가 마샬 러너 조건((외화표시 수출수요 가격탄력성 + 자국통화표시 수입수요 가격탄력성) > 1)을 충족시키지 못해 달러화가 약세가 되더라도 무역적자가 개선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달러화 강세도 부담이다. 달러인덱스는 '110'대로 뛰어올랐다. 호드릭-프레스콧 필터로 구한 장기 추세에서 5% 이상 벗어나 있는 강세국면이다. Fed의 계량모델인 '퍼버스(Ferbus = FRB + US)'에 따르면 달러 가치가 10% 상승하면 2년 후 미국 경제 성장률이 0.75% 포인트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상대국의 이익도 잘 반영하는 환율구조 모형 등으로 위안화 가치의 적정수준을 추정해 보면 6.5위안 내외로 추정된다. 8년 전 6.8위안보다 높게(절상) 나온다. 중국의 경제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잘 반영하는 '스위트 스팟'으로 이 수준을 지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패권 다툼 본질상 명시적으로 합의할 수 없다면 묵시적인 형태로 이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집권 1기 때는 '상하이 밀약설'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불발됐지만 앞으로 양국 정상이 만날 때마다 '제2 플라자 합의'보다 '제2 상하이 밀약설'이라 불리는 ‘마러라고 밀약’이 논의될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하이 밀약설과 마러라고 밀약설은 미국으로서는 확실하게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못 된다. 작년 말 뉴욕 증시 개장을 알리는 오프닝 벨에 초청된 트럼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주식보다 암호화폐를 언급한 것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선 자금 보답 차원에서 언급한 종전과 달리 중국 견제 수단으로 암호화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암호화폐가 대중 견제 수단이 되려면 국가의 가치 부여, 즉 스테이블 코인 문제가 중요하다. 가장 확실한 디지털법화(CBDC)를 도입하는 방안에 스콧 재무장관은 반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달러 위상을 강화해 글로벌 자금을 끌어드려 경제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CBDC를 도입하지 않고 국가가 가상화폐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은 '준비자산(resreve asset)'과 '전략비축(strategic stockpile)'이다. 전자는 기존 외화 보유 자산인 금 등으로 가상화폐를 대체하는 방안이나 Fed가 허락하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노믹스 2.0의 가이드라인인 '프로젝트 2025'에서 Fed의 폐지 혹은 개편안이 담긴 것도 이 때문이다.
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다. 전략비축이란 국가 안보와 국민 경제생활에 직결되는 핵심 자산을 보유하는 것을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에게 3개월 치 원유를 전략비축 자산으로 보유할 것을 권하고 있다. 가상화폐가 중국 견제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판단하면 얼마든지 전략비축 자산에 포함될 수 있다.
가상화폐가 전략비축 자산으로 포함되면 법정통화인 달러를 담보로 하는 스테이블 코인과 비슷한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 조건이 충족돼 현재 20만 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비트코인을 신시아 루미스(공화당 상원의원·와이오밍)의 법안대로 100만 개 이상으로 끌어 올리면 달러 가치까지 상승해 트럼프 집권 2기의 또 다른 과제인 인플레이션과 국가부채를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로 대응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기축통화로서 위안화의 위상을 보면 미국에 맞대응할 수 있는 '눈과 이'의 수준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트럼프의 가상화폐 공약이 역대 최대 규모의 '펌프 앤 덤프(Pump and Dump·가격을 띄운 뒤 일거 매도)'가 될 것이라는 비판이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이 근거에서다. 추세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러라고 밀약과 스테이블 코인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 증시는 자체 요인에 의해 움직일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집권 출범 직전까지 미국 증시는 고성장·저물가의 신경제 신화로 주가가 크게 올랐던 1990년대 후반의 골디락스 장세를 뛰어넘어 '불꽃 장세(fire market)'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성장률과 정책(기준)금리가 각각 5~6%대였던 1990년대 후반에 훨씬 못 미치는 2%대, 4%대인데도 미국 주가가 당시에 비해 더 오른 것은 글로벌 자금이 미국 증시로 집중적으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작년 들어 10월 말까지 글로벌 자금의 60% 정도가 미국으로 유입됐다.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그 비중이 70%까지 높아졌다.
2차 대전 이후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집중적으로 유입됐던 때는 국제금리 간 '대발산(GD·Great Divergence)'이 나타났던 시기와 맞물린다. GD가 처음 나타났던 1990년대 후반 이후 상황을 보면 미국 중앙은행(Fed)은 1995년 이후 불과 1년 만에 정책금리를 3.75%에서 6%까지 올렸다. 같은 기간 중 독일의 분데스방크는 5%에서 4.5%로 내렸다.
정책금리 간 GD로 '루빈 독트린 시대'라 불릴 만큼 강달러 시대가 전개됐다. 1995년 4월 달러 가치 부양을 위한 역플라자 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79엔에서 148엔까지 급등했다. 고금리·강달러로 자금이탈이 집중됐던 신흥국은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국가부도까지 이어지는 '그린스펀·루빈 쇼크'에 시달렸다.
하지만 작년 들어서는 각국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내리는 피벗을 추진했다. 1990년대 후반 상황이라면 정책금리 간 GD로 미국으로 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꼬리(신흥국 중앙은행)가 몸통(선진국 중앙은행)을 뒤흔드는 웩더독 피벗 추진 과정에서 Fed가 뒤늦게 참여한 시기까지 정책금리 간 차이로 미국으로 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Fed가 피벗을 추진한 이후 나타나고 있는 '수수께끼(conundrum)' 현상이다. 작년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이후 정책금리가 1%포인트 내렸지만 10년물 국채금리는 1.2% 포인트 급등했다. 같은 기간 중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의 국채금리는 하락했다. 1990년대와 달리 시장금리 간 GD가 발생하고 있다.
달러 가치도 빠른 속도로 오르면서 미국 이외 국가는 연일 환율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외화만 소진할 뿐이다. 일본 대장성은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엔·달러 환율은 개입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왔다. 내부 문제까지 겹친 원·달러 환율은 1차 방어선 1,400원, 2차 방어선이 연속해서 뚫리면서 1,500원대가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 시장금리 간 GD는 지속될 확률이 높다. 감세와 뉴딜 정책, 고관세와 불법 이민 색출 등으로 총수요와 총공급 양면에서 물가가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채 수급 면에서 연방 부채 상한 폐지를 놓고 이미 의회와 격돌을 벌일 만큼 재정적자와 국가부도 우려로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
펀더멘털과 정책금리를 뛰어넘는 과도한 글로벌 자금 유입으로 주가가 오르는 것은 거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증시를 이끌어왔던 빅테크 주가는 주가수익비율(PER)과 같은 종전의 주가 평가 잣대로 고평가된 지 오래됐다. 매출액 대비 주가 비율(PSR)과 같은 새로운 주가 평가 잣대로 미래 잠재 가치가 높게 평가되면서 빅테크 주가 상승세가 연장되고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첫해 미국 증시는 '해로드-도마의 칼날 성장 이론'로 비유된다. 작두를 타는 무속인이 칼날 위에서 떨어지면 큰 상처가 나듯이 '불꽃 장세'와 '거품 붕괴' 간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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