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처럼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질서를 잡아줘야 할 국가의 통수권자일수록 수난을 겪고 있다.
선진 7개국(G7) 중 영국의 리시 수낙 총리와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교체됐다. 내년 1월 20일이면 조 바이든 대통령도 물러난다.
사회주의 국가의 양대 축(S2)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각각 경기 부진과 전쟁에 따른 국력 소모로 흔들리고 있다.
G7과 S2 통수권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세계경제질서가 '그룹 제로(G0)'로 가는 시대에서는 국제 공동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G7과 S2 통수권자의 역할이 가장 절실한 각국 간 전쟁부터 장기화하고 있다. 내년 3월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이 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도 1년이 넘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2기 첫해가 될 2025년에 예상되는 세계경제질서는 ∆미국과 중국이 경제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신냉전(new cold war)' 2.0 ∆미국과 중국이 상호 공존하는 '차이메리카(chimerica)'
∆지역 혹은 국가별로 분화하는 '분권화(decentralization)' ∆모두 조화하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 ∆무정부 상태인 '서브 제로(sub zero)' 등의 다섯 가지 시나리오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세계경제질서에 두 축인 미·중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면 감(感)을 잡을 수 있다.
1970년대 들어서자 '핑퐁 외교'로 시작된 양국 관계는 '커플링(coupling·동조화)'에서 출발했다.
당시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노력으로 이끌어낸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1979년에는 국교가 수립됐다.
국교 수립 이후 2012년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까지 미·중 간 관계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된다.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정치경제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개념은 중국을 포함한 비서구 국가를 글로벌화 하고, 시장경제에 편입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략을 말한다.
미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중국의 대외경제정책 기조인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2차 대전 이후 전범인 독일을 포함한 유럽 부흥에 기여한 '마샬 플랜'이라 부를 정도로 중국이 성장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편향적으로 만들었다. 마치 중국이 없으면 대외경제정책이나 기업경영전략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총소득(GNI)이 WTO 가입 직전 미국의 17% 수준에서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에는 55%로 3배 이상 높아졌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글로벌시대에 동참해 급성장한 것은 미국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과의 경제패권 경쟁자로 키우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미·중 간 관계가 커플링에서 디커플링으로 변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경제질서인 팍스 시니카 야망을 꿈꾸었던 시진핑 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대외경제정책 기조를 '주동작위(主動作爲·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로 급선회했다.
행동계획으로 일대일로, 위안화 국제화, 제조업 2025, 디지털 위안화 기축통화 구상 등 중국의 세력 확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순차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두 컨센서스 간 충돌이 정점에 이른 것은 트럼프 집권 1기 대중국 견제전략인 '나바로 패러다임'을 추진할 때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시절부터 초강경 중국론자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함무라비 법전식으로 중국을 철저하게 배제해 나가는 디커플링 전략을 추진했다.
'대중국 견제'라는 관점에서 나바로 패러다임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 중국의 GNI는 미국의 75%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 등은 바이든 대통령의 연임을 가정해 집권 기간인 2027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시진핑 주석의 팍스 시니카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자신의 집권기간 중 경제패권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대 굴욕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중 간 관계 개선에 다리를 놓았던 키신저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제3차 대전을 우려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자 디커플링 전략의 한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먼저 손을 내민 국가는 중국이다. 중앙아시아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랭경온(政冷經溫·정치 군사적으로 냉랭한 관계 속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
기류로 바뀌면서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잇달아 초청하고 있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가려졌던 수정된 워싱턴 컨센서스인 '설리번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미·중 관계를 고려하면 트럼프 집권 2기 들어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양국 간 이해관계에 따라 '차이메리카'와 '신냉전 2.0'이 반복되는 줄기 속에
다른 국가는 자국 문제 해결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중층적 분권화 시나리오(multi-level decentralization scenario)'다.
이 경우 세계경제질서는 글로벌스탠더드가 통하지 않으면서 미래 예측까지 어려운 '뉴 앱노멀 젤리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뉴 앱노멀 젤리형 세계경제질서는 종전의 스탠더드와 거버넌스에 내재된 한계에서 비롯된다.
2차 대전 이후 스탠더드와 지배구조를 주도해 왔던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발생했고,
각국이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한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도 가장 큰 피해를 받음에 따라 주도국으로서의 위상과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다.
G0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국가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경제발전단계를 높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뉴밀레니엄 시대 이후 G7 이외 새로운 중심국으로 부각할 것으로 기대됐던 브릭스 국가가 공통으로 갖고 있던 인구와 부존자원 이외 다른 성장 동인이 있어야 주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
로스토우(W. W. Rostow) 교수가 주장했던 '제2의 도약론'이다.
새롭게 거론되는 성장 동인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디지털 콘텐츠가 변화되는 초연결 사회에서는 '중심축 국가(pivot state)'일수록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심축 국가란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국가와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디지털 콘택트 초연결 시대에서는 미·중 간 마찰은 '디지털 통화전쟁'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미국보다 앞서 도입해 법정통화 단계까지 끌어올린 중국은 미국의 신정부가 들어오는 2025년부터 디지털 위안화를 일대일로(一帶一路),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을 주축으로 국제위상을 높이는 노력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구축할 경우 글로벌 화폐 발행 차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국 금융사의 자금조달 효율성과 편리성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화가 급진전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미국은 글로벌 화폐 발행 차익을 연간 23∼118억 달러로, 전체 조세수입의 0.4∼1.8%에 달하는 큰 혜택을 누려왔다.
민간 권력이 국가 권력까지 넘보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을 불허하는 도널드 트럼프 직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미국도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양대 경제수장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잇달아 '디지털 달러화' 도입 방침을 밝혔다. 더 늦출 수 없는 국면에 몰렸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의 화폐 생활도 빠르게 변하면서 현금 없는 사회가 닥치고 있다.
오히려 공식화폐인 법화(法貨·legal tender)를 갖고 있으면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은 "바보다"라고 조롱할 만큼 '현금의 저주'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현금의 저주란 5년 전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가 쓴 『화폐의 종말』에서 처음 주장해 충격을 줬던 용어다.
대외적으로는 현실로 닥치고 있는 '트리핀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트리핀 딜레마란 세계 교역 증가세에 맞춰 달러화를 계속 공급해야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달러 가치 하락으로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벨기에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의 주장이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더이상 달러 패권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는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담했던 달러화 보유 구속,
즉 '달러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 경우 보유 달러화가 대거 출회되면서 달러 가치가 추가로 떨어지는 악순환 국면에 몰릴 수 있다.
Fed가 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은 풀린 달러화를 환수하는 출구전략이다.
하지만 2015년 12월 금리인상 이후 추진한 출구전략 추진 과정에서 입증됐듯이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Fed가 피봇을 지연시킴에 따라 상업용 부동산 침체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논의되는 화폐개혁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트럼프 당선자가 가장 원했던 '금본위제 부활'이다. Fed가 달러화 공급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금값이 오른 것도 이 요인이 한몫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금 공급량 제한과 금 보유국에게 또 다른 특혜가 집중된다는 점에서 실행에 옮기기는 사실상 어렵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달러화' 도입을 앞당기는 방안이다. Fed는 디지털 통화 시대가 닥칠 것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대책반을 구성해 준비해 왔다.
현재 통용되는 달러화와 별도로 '디지털 달러화'를 언제든지 발행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단계까지 와있다는 평가다. 트럼프 당선자도 종전의 태도를 바꿔 '비트코인 왕국론'을 주장하고 있다.
2025년에 디지털 위안화와 디지털 달러화 간에 또 다른 형태의 기축통화 전쟁이 앞당겨질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양국 간 다툼은 우리 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간자에 서 있는 우리로서는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면 불리해지는 만큼 미국 편향인 대외정책상 우선순위를 조정해 하루빨리 균형을 찾아 놓아야 한다.
트럼프 집권 2기 들어 새롭게 전개될 미국과 중국 간 마찰 시대에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의 앞날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심축 사회에서 더 거세질 양국의 네트워크 가담 요구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와 '앞으로 전개될 디지털 통화전쟁에 디지털 원화의 위상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만큼 중요한 과제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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