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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행정부의 시작과 경제 회복 스토리
(2018년 08월 기사)

클린턴 행정부의 시작과 경제 회복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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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08월 기사)
기고: 디지털서비스팀 권형우 매니저
안녕하세요? 오늘은 1992년 대선을 기점으로 1997년까지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 당시 '젊은 피'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미국의 경제와 월 스트리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린스펀과 클린턴 대통령의 만남

한 쪽에서는 제 3 후보의 등장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를, 한 쪽에서는 민주당과 미국의 새로운 희망이라 평가받던 클린턴 대통령의 최대 과제는 자신이 부시 전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 썼던 구호처럼 바로 '경제'였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한 사람이 백악관을 방문합니다. 그의 이름은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으로, 1987년 레이건 정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지난 번 블랙 먼데이 때 잠깐 언급했던 인물이었던 '인플레이션 파이터'인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의 후임이지요.

백악관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악명 높았던 스태그플레이션을 고금리정책으로 잡았던 볼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은 대신 경기 침체가 일시적으로 발생했고, 이러한 이유와 함께 볼커를 지지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레이건에 밀려 재선에 실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의 대 공산정권 유화책을 비판하고, 오일쇼크를 돌파하기 위한 금리 인상으로 침체된 미국 경제를 예로 들어 경제 면에서도 카터 대통령에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카터 대통령의 몇몇 참모들은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자 "볼커가 인플레이션은 잡았지만 카터 정권도 잡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금융정책에서 규제를 중시한 매파 볼커는 그 이후 레이건 행정부와 '글래스 스티걸' 법 완화를 두고 충돌하게 됩니다. 이 법은 1930년대 대공황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을 겸업하지 못하게 한 조치였습니다. 즉, 1930년대 당시 상업은행이 투자은행 업무를 겸업하면서 이를 방만하게 운영, 대공황을 불렀다는 인식 때문에 탄생했던 법이지요.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완화하려고 한 반면, 볼커는 규제의 유지를 주장하며 충돌하게 됩니다.

레이건 대통령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결국 볼커는 1987년 10월, 8년간의 FED 의장 생활을 내려놓습니다. 이후 앨런 그린스펀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 역시 스승이었던 볼커만큼이나 '세계 경제대통령' FED의 최장수 의장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지만 이는 훗날의 일입니다.

레이건 행정부가 쌍둥이적자로 많은 재정 빚을 쌓아놓은 덕분에 이를 수습하기 바쁘다가 정권까지 내주게 된 부시 행정부를 지켜봤던 그린스펀. 그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긴축 정책을 제안합니다. 그린스펀은 만약 현재의 재정적자가 계속된다면 금융위기가 올 수 있음을 경고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긴축 정책에 나서게 됩니다.

앨런 그리스펀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쌍둥이적자를 위한 노력

가장 큰 숙제였던 쌍둥이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은 경상수지 개선과 재정개혁을 위해 팔을 걷어붙입니다. 먼저 클린턴 행정부는 전자정부화 사업을 개시합니다. 이 사업으로 정부기관 대부분이 전자화하면서 30만 명의 공무원을 감축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공화당 정부 시절 감세를 대폭 없애고 누진세를 늘려 정부 재원을 확보합니다. 이는 야당이었던 공화당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당시 엘 고어 부통령이 찬성권을 행사하면서까지 이를 강력하게 관철시킵니다.

키보드 사진

아울러 클린턴은 NAFTA 체결에 앞장서 북중미 지역을 미국의 영향에 두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슈퍼 301조'를 통해 대부분 나라의 관세와 같은 무역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슈퍼301조에 따르면 보호무역 국가에 대해 미국은 반덤핑과세나 수입금지 등 무역보복조치를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를 수출 시장으로 삼으며 보호정책을 펴왔던 국가들 대부분이 백기를 들고 미국의 제품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미국의 경상수지도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미국 월 스트리트의 흐름도 긍정적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다시 황금기가 찾아온 월스트리트, 그리고 1994년 채권시장

Dow jones 그래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

1990년대 쌍둥이 적자 해결로 인해 미국경제가 다시 힘찬 도약을 시작하면서 다우존스 지수가 꾸준히 상승합니다. 실제 이 때 주식 열풍으로 인해 401k 연금으로 대부분의 자산을 주식에 투자했던 사람 중에는 연금부자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든 시장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1994년은 채권시장 투자자들에게 악몽의 시기였습니다.

1994년, 그린스펀 FED 의장은 시장에 어떠한 신호를 주지 않은 채 기습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합니다. 이에 투자자들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혹시 추가적인 긴축을 단행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채권 매각에 나섰는데요. 이에 1994년 11월, 10년물 미국 국채에서 17.5% 수익률 손실이 발생하는 등 채권투자자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등의 신흥채권시장의 수익률도 크게 요동치면서 채권 대폭락 사태가 발생했는데요. 이를 두고 포춘지가 '채권 대학살'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채권 투자자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1990년 전반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졸업한 미국과 월스트리트. 이제 다음 시간에는 매우 중요한 1997년 '외환위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과연 1997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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