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바로가기 본문 내용 바로가기

미래에셋증권 홈페이지

68운동과 독재자의 죽음
(2023년 11월 기사)

68운동과 독재자의 죽음
메인 이미지 보이기
  • 처음 >
  • 투자 이야기 >
  • 쉽고 재미있는 투자의 역사
    (2023년 11월 기사)
기고: IT지원팀 권형우 선임매니저
안녕하세요. 어느새 스산해진 기운이 가득하고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환절기인 만큼 독감과 코로나19가 동시에 유행한다고 하니 모두 건강 유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 포르투갈의 정치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8운동이 살라자르에게 준 충격

살라자르의 독재는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지됐습니다. 1937년 살라자르를 암살하기 위해 총리 관저에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 살라자르는 순탄하게 포르투갈을 통치해 왔습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바와 같이 철저한 우민 정책을 기반으로 하되, 정적 암살이나 학살, 처형 등 극단적인 독재정치를 펴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바로 옆에 위치한 스페인의 프랑코보다는 상대적으로 인권문제에서 낫다고 평가받았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포르투갈이 지원했던 연합국 위주로 냉전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의 국제적 입지는 탄탄했습니다. 앞의 글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르투갈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연합국을 지원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1943년 미국과 아조레스 제도에 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든든한 뒷배 덕분에 포르투갈은 독재국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68운동 - 1968년 5월 보르도의 바리케이드
프랑스의 68운동 - 1968년 5월 보르도의 바리케이드 사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그러나 살라자르의 인생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납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8명의 청년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합니다. 이후 시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졌고, 젊은이들은 저항과 해방을 내걸며 대규모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를 68운동, 혹은 68혁명이라고 합니다. 이 청년들은 기존의 기독교, 가톨릭적인 질서와 문화에 반감을 표했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비판, 성적 억압이나 남녀 분리 등 전통 질서에 대해서도 저항했습니다.
68운동의 결과로 프랑스의 드록 정권은 실각했고 이는 살라자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가 추구해오던 전통적인 질서가 전 유럽에서 68운동으로 인해 무너지고 비판받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라자르의 최후

1968년 6월 12일 각료 회의에서 살라자르는 갑자기 이전에 처리된 안건을 가지고 중언부언을 하는 등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8월 휴가를 보내다가 해먹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며 뇌출혈을 일으켰고, 9월에는 뇌졸중까지 발생하며 건강이 심하게 악화됩니다.
포르투갈 정부는 살라자르의 후임을 정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살라자르가 병실에 있는 동안 관료들은 그를 총리직에서 제명하기로 했고, 1968년 9월 27일 대통령 지명으로 후임 총리로 리스본 대학교 총장 출신의 국민동맹 의장이었던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지명됩니다.
마르셀루 카에타누를 선출했으나 살라자르는 병세에서 회복합니다. 그러나 정신 자체는 온전하지 못했고, 그를 따르던 내각은 살라자르에게 새로운 총리가 뽑혔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합니다.
1969년 안토니오 살라자르 총리
1969년 안토니오 살라자르 총리  사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때문에 내각은 영화 <트루먼쇼>처럼 살라자르가 여전히 총리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살라자르가 병세가 악화돼 총리관저에만 있어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정부와 관료 등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살라자르는 외부에 자신의 모습을 거의 노출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국민들도 살라자르 총리에 대해 잘 몰라 이런 연극이 가능했습니다.
관료들은 늘 살라자르가 했던 것처럼 업무 보고를 진행해 결재를 받았고, 살라자르가 총리인 것처럼 의전을 다했습니다. 이 연극을 보다 못한 가정부가 제발 총리직을 그만두라고 살라자르에게 애원했지만 살라자르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나라를 운영해야 한다며 결코 총리직, 실제로는 가짜인 직책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총리라고 믿으며 살아가던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1970년 7월 27일에 눈을 감았습니다. 장기 독재자의 죽음은 포르투갈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