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존 장마와 달리 폭우와 폭염이 일 단위로 반복되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구 온난화 영향 때문인지 지방이나 도시 곳곳에서 폭우 피해가 많이 들립니다.
피해를 입은 분들께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리프 전쟁에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었다는 글을 끝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리프 전쟁의 결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프랑스, 대규모 침공을 진행하다
프랑스가 리프 공화국 공격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전황은 변화의 기미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글에서 봤듯이 프랑스 군의 지휘관은 필리프 페탱이었습니다.
그는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였던 베르됭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프랑스로 밀려오던 독일군을 저지하고, 미군과 함께 대규모 반격을 단행해 1차 세계대전을 끝낸 전쟁영웅입니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전 국민적인 인기로 프랑스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군으로 돌아온 페탱은 일찍부터 공군과 전차의 증강을 대대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듯이 대규모 병력과 탱크, 항공지원까지 앞세워 리프 공화국을 공격합니다.
프랑스 군은 게릴라에 익숙한 리프 공화국을 패퇴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과 화력을 앞세운 압도적인 대규모 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1929년 9월 8일, 알호세이마 지역에 스페인과 프랑스 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펼쳐집니다.
당시 프랑스 군은 폭격기와 함포 사격, 새로운 신무기인 르노 FT-17 경전차를 앞세워 리프 공화국을 공격합니다. 여기에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미 공군까지 가세했습니다.
리프 공화국은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많은 병력을 잃고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 외인부대의 활약
한편 알호세이마 상륙 작전에서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외인부대는 선봉에 나서 리프 공화국을 공격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프랑코는 프랑스 군을 이끄는 페탱과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톨레도의 보병학교는 당시 프랑스의 육군대학에 위탁 교육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시 육군대학 교수 중 한 명이 필리프 페탱이었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의 유학생으로 선발돼 프랑스 육군대학에 위탁교육을 갔고, 육군대학에서 맺은 사제 관계를 전쟁터에서도 이어가게 됩니다.
지리멸렬한 추태를 이어가던 스페인 군과 달리 외인부대는 프랑코의 지휘를 받으며, 프랑스 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승전을 거듭하기 시작합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외인부대는 프랑코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실상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살펴볼 스페인 내전까지 이어집니다.
압델 카림의 항복과 리프 전쟁의 종결
한편 모로코의 압델 카림은 고민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프랑스 군과 스페인 군은 게릴라 피해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인과 군대를 가리지 않으며 겨자 가스를 살포하고 있었고 베르베르족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겨자 가스 등 스페인과 프랑스가 살포한 독가스 공격은 다수를 사망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암환자를 발생하게 하는 등 모로코 베르베르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결국 압델 카림은 항복을 결심합니다. 단, 그가 항복한 군은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족을 오랫동안 직접적으로 수탈했던 스페인이 아니라 프랑스 군이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항복한 압델 카림을 인도양에 위치한 식민지인 레위니옹 섬으로 추방했고, 압델 카림은 그 곳에서 21년간 복역합니다.
이후 그는 석방돼 이집트로 향했고, 이집트에서 '아랍 마그레브 해방위원회'를 조직해 1963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합니다.
스페인은 결국 프랑스의 도움으로 리프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리프 전쟁에서 스페인 군이 보인 지리멸렬한 추태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겼고, 이는 스페인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불러오게 됩니다.
즉 상처뿐인 승리에 머물렀습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