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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운동화를 향한 집념, 아디다스(ADIDAS) (2018년 12월 기사)
(2018년 12월 기사)

완벽한 운동화를 향한 집념, 아디다스(ADIDAS) (2018년 12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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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의 삼선 로고는 가죽 신발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발끈을 세 번 감아 묶은 모습에서 착안된 것이다. 이처럼 신발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로고를 디자인했듯 아디다스는 줄곧 더 가볍고 더 튼튼한 운동화 제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25년 이후 아디다스 운동화는 금메달 획득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신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아디다스의 전설적인 역사를 되돌아보자.
아디다스 로고

브랜드 정리

1949년 아돌프 다슬러가 독일에 설립한 스포츠 브랜드이다. 전 세계에 운동화, 스포츠의류, 운동 용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작은 신발 공장에서부터 시작된 전설

아돌프 다슬러 신발공장 사진
출처: 아디다스 공식홈페이지(https://www.adidas-group.com)
아디다스 브랜드가 시작되기 30여 년 전부터 설립자 아돌프 다슬러는 혼자 트레이닝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운동선수였던 그는 금방 닳아버리는 운동화 대신 내구성이 강한 운동화를 만들고자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다 1924년 형 루돌프 다슬러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아돌프 다슬러는 꼼꼼한 신발 개발자였고, 형은 외향적 성격의 유능한 세일즈맨이었으므로 둘은 수월하게 공장을 이끌어갔다.

1925년 그는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했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던 이 신발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2년 LA올림픽을 계기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아돌프 다슬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최고의 육상 선수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에게 자신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경기를 뛰어줄 것을 부탁했고 그는 요청에 응했다. 그 결과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금메달이 목표인 세계 각국의 선수들은 앞 다퉈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원하게 되었다.

'축구' 전문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다

1949년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 다슬러(Dassler)를 결합해 아디다스(Adidas)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형 루돌프 다슬러와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지 2년만의 일이었다. 아디다스는 첫 걸음을 떼자마자 독일 축구 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되었다. 5년 뒤 열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아디다스가 급성장할 수 있는 큰 기회의 장이 되었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했던 서독대표팀은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고 경기를 뛰었다. 서독의 우승을 점치는 이는 드물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승전까지 올랐다. 강팀 헝가리와 경기를 펼친 서독팀은 경기 초반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폭우가 내리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는 바닥의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는 신발이었기에 진흙탕에서도 원래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대 2 동점이던 상황에서 서독 선수가 결승골을 넣으며 서독이 우승을 했고 아디다스의 기술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월드컵 우승은 패전국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었고, 아디다스가 축구 전문 브랜드로 급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독일 우승 사진
출처: ⓒTeamOcean2010, flickr(https://www.flickr.com)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공인구 사진
출처: ⓒFlorian K,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우승을 가져온 아디다스의 징 박힌 축구화는 한 해 45만 켤레 넘게 생산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63년에는 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아디다스 축구공은 모든 FIFA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되었다. 1980년대까지 아디다스는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며 독주를 이어갔다.

패셔너블한 브랜드 이미지를 더하다

힙합 그룹 런 디엠씨 사진
출처: ⓒJeff Pinilla,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다슬러 가문의 경영이 막이 내리고 1990년 전문 경영인 베르나드 타피에(Bernard Tapie)가 CEO 자리에 올랐다. 그의 대표적인 성과는 미국의 힙합 그룹 런 디엠씨(Run DMC)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스트리트 스포츠웨어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런 디엠시 라인의 시그니처 제품들은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마이클 조던을 앞세웠던 나이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수익을 냈다.

아디다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삼선 트레이닝복을 비롯한 의류의 시작은 베르나드 타피에 덕이었다. 2001년 새로운 CEO 헤르베르트 하이너(Herbert Hainer)가 취임했고 그는 요지 야마모토, 스텔라 매카트니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이뤄냈다. 그리고 2006년 아디다스는 리복을 인수했고, 2011년 아웃도어 전문브랜드 파이브텐과도 합병했다.

운동화에 혁신적인 기술을 접목시키다

2013년 아디다스가 뛰어난 쿠셔닝과 에너지 리턴을 동시에 충족하는 신기술, 부스트(BOOST)를 선보였다. 종합 화학 회사 BASF와 협력하여 특수 제작된 수천 개의 에너지 캡슐을 사용해 기존 제품보다 월등히 향상된 러닝 에너지 리턴을 느낄 수 있게 제작했다.

부스트의 핵심은 쿠셔닝을 느끼게 하는 소재에 있다. 열가소성 폴리우레탄 엘라스토머(TPU)를 수천 개의 작은 캡슐로 변환시켜 에너지를 캡슐에 저장한 뒤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게 개발한 것이다. 날씨와 오랜 시간의 러닝에도 관계없이 편안한 착화감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라인으로 수많은 소비자를 사로잡다

선수들의 기량이 발전하고 포지션이 세분화되면서 축구화 기능 역시 그에 발맞춰 매우 다양해졌다. 아디다스는 네 가지 사일로에 맞춘 축구화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피드 사일로, 컨트롤 사일로, 에너지 사일로, 컴포트 사일로로 명칭에서 축구화의 핵심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아디제로 f50'은 스피드 사일로의 대표 모델로 공격수나 윙어(Winger)처럼 빠른 스피드와 민첩한 움직임이 필요한 선수들이 즐겨 신는다. '프레데터'는 컨트롤 사일로 대표 모델로 정확한 패스를 구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에 미드필더에게 인기가 많고, 경기장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활동량 많은 미드필더는 에너지 사일로 모델인 '나이트로차지'를 신는다. 포지션과 무관하게 편안한 착화감을 원하는 선수들은 컴포트 사일로 모델인 '아디퓨어 11pro'를 즐겨 착용한다.

프레데터 운동화 사진
출처: ⓒJan S0L0,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스탠스미스 운동화 사진
출처: ⓒTohlsson,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한편, 2001년부터 시작된 라인으로, 개성이 강한 젊은 세대들이 주로 구매한다. 1960년대 유행했던 스포츠화를 재현한 제품들과 아디다스의 역사적인 제품들을 재해석한 제품들로 이루어졌다. 특히 아디다스 오리지널 스탠스미스(Stansmith)는 1970년대 테니스계를 이끌었던 선수 스탠리 스미스(Stanley Smith)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1971년에 제작된 경기용 테니스화로 역사상 최초로 갑피를 가죽으로 만든 테니스화이다. 뿐만 아니라 스트리트 신발로도 인기를 얻어 전 세계적으로 4천만 켤레 이상이 팔려 아디다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신발로 이름을 올렸다. 팬들의 재요청으로 2014년 4월부터 재발매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1-03-18 16:33:19 글로벌 브랜드 히스토리에서 복사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1-03-18 18:18:36 [복사]지난 코너 보기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이정문님의 댓글

이정문

우리나라도  이런 기업이  있어야하는데  대기업을 생태적으로  어렵게하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