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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의 폭풍이 불러온 대공황의 모습은?
(2017년 06월 기사)

주식시장의 폭풍이 불러온 대공황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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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6월 기사)
기고: 디지털서비스팀 권형우 매니저
지난 5월호에 소개한 '20세기를 뒤흔들었던 대공황 이야기' 재미있으셨나요? 이번엔 대공황(Great Depression, 大恐慌)이 당시 미국 주식시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29년, 검은 목요일이 미국 월 스트리트를 덮치다

1929년 미국에서는 공화당 출신의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가 새롭게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지만 특유의 명민함을 바탕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광산을 개발하여 백만장자에 오른 후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식량국장으로 일하며 실무적 능력을 널리 인정받습니다.

이후 공화당 정권 하에서도 유럽에 대한 원조정책 등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지명돼 31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만약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허버트 후버. 안타깝지만 그는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게 됩니다.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증시 고점이었던 381.17을 기록하며 순항을 이어가던 다우존스지수는 순식간에 매도세가 몰리는 바람에 하루에만 20% 이상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며 추락합니다. 하락세에 공포에 질린 투자자들은 1,300만 주에 달하는 주식 물량을 쏟아냈고, 10월 29일에는 무려 1,600만 주가 넘는 물량들이 시장에서 매도 처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대공황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위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ko.wikipedia.org/)

당시 폭락을 막기 위해 주식중개인들이 US스틸의 가격을 높게 매겨 사주기도 했지만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되는 신세가 됩니다. 더 심각한 건 많은 투자자들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투자에 나섰던 만큼 은행들 역시 대공황의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시중의 통화 공급은 위축되었고 기업들 역시 은행들로부터 돈을 대출받기 어려워지자 연달아 부도가 나는 최악의 사태가 이어집니다.

대공황의 미국

은행앞에 줄선 사람들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ko.wikipedia.org/)

1929년 100만 명에 달했던 실업자는 1932년에 1,300만 명 이상의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배급소와 기부자들의 지원을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파산한 사람들과 실업자들은 도시 곳곳에서 판자촌을 이루며 살았고 사람들은 이를 비아냥거리는 의미에서 후버촌(Hoovervilles)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공장노동자나 중산층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지역의 농업 경제력이 확보되면서 단가 하락에 빠진 농민들은 경제 정상화를 믿고 소비를 늘려왔는데 도리어 곤경에 빠지자 잉여농산물을 바다와 강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빈민가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ko.wikipedia.org/)

사실 후버 대통령은 미국적인 입장에서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판자촌들이 생기고 경제 공황으로 인한 절도, 강도 등의 사태까지 빈번해지자 뒤늦게 경제 회복 정책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허사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집권 후반기에 입안한 정책들이 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이런 경제적 혼란 속에서 미국에서는 은빛셔츠단(Silver Shirts) 등의 파시스트 조직들이 군중을 선동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윌리암 펠리에 의해 설립된 이 준군사조직은 1934년에 1만 5천 명의 멤버를 모집하며 기세를 크게 올렸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조직은 독일 히틀러의 '갈색셔츠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당시 나치의 후원을 받아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건설하고 리더인 월리엄 펠리가 대통령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후버를 재선후보로 지명하지만, 후버는 해군 출신의 개혁자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참패합니다.

이전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먼 친척인 루즈벨트는 민주당 출신으로서 뉴딜 정책을 통한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통해 미국의 경제를 회생시킬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즉, 그동안 후버가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하여 국가의 경제 개입을 최소화했다면 그는 반대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경제 회복을 노린 것입니다.

후버 대통령과 후버댐

재선에 실패한 후버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자신은 대공황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며 1945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정계에서 모습을 감춥니다. 물론 대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을 후버 대통령의 실책으로만 100% 돌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후버 대통령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후버댐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ko.wikipedia.org/)

루즈벨트가 기획한 뉴딜정책의 한 방향은 대규모 건설사업 등을 통해 총수요를 진작하고 실업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업 중 하나로, 현대 건축 기술의 경이라고 평가받는 댐이 하나 탄생합니다. 바로 후버댐(Hoover Dam)인데요. (원래 명칭은 볼더댐이었으나 1947년 이후 후버의 이름을 따 개명됩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완성된 후버댐을 보고 그 기념 동판에 '후버 대통령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새기게 합니다. (실제로 후버 대통령은 댐의 건설을 기획한 바 있습니다.) 뉴딜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후버의 이름이 미국 뉴딜정책의 산물인 댐에 붙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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