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양대국인 미국과 중국 간 통상마찰이 좀처럼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첫 해에는
구체적인 조치보다는 경고성 말싸움에, 올해 들어서는 '보복관세 전쟁', 최근에는 미래 국부 주도권을 놓고 '첨단기술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미·중 간 통상마찰이 1년 반 이상 지속됨에 따라 이미 여러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세계가치사슬(GVC·Global Value Chain)이
약화되고 있는 점이다. GVC란 '기업 간 무역(Inter Firm Trade)'와 '기업 내 무역(Intra Firm Trade)'로 대변되는 국제 분업 체계를 말한다.
각국의 보호주의로 GVC 약화 현상은 세계 경제 앞날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던 1990년대 이후 세계교역증가율과
GVC 간 상관 계수를 추정해 보면 0.85에 이를 만큼 높게 나온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세계교역탄성치(세계교역증가율÷세계경제성장률)에서 GVC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지속돼 왔던 세계경기 장기호황 국면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비관론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등 세계 3대 예측기관은 올해와 내년 세계 경제 성장률을 하향 조정했다. 글로벌 증시가 추세적으로 하락국면으로 돌아서고 있다.
보호주의 색채로 본다면 '역대 최고'로 평가된다. 트럼프 정부의 대외통상정책이 '극단적 보호주의'로 흐를 것으로 우려해 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대외통상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정부와 구별되는 네 가지 특징이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
첫째, 미국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부담과 책임만 지는 국제규범과 협상에 대한 우순선위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와 범태평양경제협의체(TPP) 탈퇴 의사, 파리 신기후 협상 불참 통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혹은 재협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목적을 도달하기 이해서는 모든 통상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종전과 다른 점이다. 반덤핑관세, 상계관세 등 WTO 규범에서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미국의 통상법에 근거한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다. 심지어는 미국 의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명령으로 발동할 수 있는 슈퍼 301조까지 동원한 태세다.
셋째, 통상정책을 다른 목적과 결부시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국 통상법 232조에 근거해 통상을 안보와 연계시키고, 대북한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중국,
한국에 대해 집중적으로 통상압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 등 해당 국가가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에 쉽게 대처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넷째, 국가별로는 무역적자 확대 여부에 따라 이원적 전략(two track)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대미국
흑자국에게 성장과 고용을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이 때문에 무역적자 확대국에 대해 통상압력을 가해 시정하고, 다른 국가와는 공존을
모색하는 '차별적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문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전부터 미국과 중국 간 마찰이 심상치 않다. 무역, 통상, 지적재산권 등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남중국해 등
경제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세계 경제 양대 축인 두 국가 간 마찰은 그 파장이 의외로 커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앞으로 미·중 간 통상마찰은 쉽게 타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경제 주도권 싸움인데다 경제발전단계 차이가 워낙 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쉽게 줄어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스트롱맨인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 입장에서도 밀리면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우려 또한 장애요인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이 먹힐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도의 협상 전략가다. 성공한 기업인 출신답게 참가자 모두가
이익을 취하는 '샤프리-로스식 공생적 게임(non zero-sum game)'보다 참가자별 이해득실이 분명히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쉬식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즐긴다.
트럼프 입장에서 중국을 대상으로 한 '통상압력' 카드는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이다. 중국은 진퇴양난 여건이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압력에 반발한다면 수출이
둔화되면서 '경착륙'과 '중진국 함정' 우려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대로 수용한다면 시진핑 정부의 '팍스 시니카' 구상은 물 건너 갈 수 있다.
중국의 전략도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미·중 간 마찰의 핵심수단이었던 보복관세 대결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이 높은 핵심 품목을 겨냥하는 대신 미국
이외 국가에 대해서는 관세인하를 추진하는 이원적 전략(two track)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면서 미국을 대신해 자유무역 주도국으로 확실하게 부상하겠다는 의도다.
중간선거 직전부터 미국 행정부 차원에서는 쓸 수 있는 마지막 무역전쟁 카드인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급부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의지를 종전보다 더 강하게 내비쳤다. 앞으로 미·중 간 무역전쟁의 핵심수단이 될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한다면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환율 조작국의 뿌리는 1988년 종합무역법에 근거해 미국 재무무가 매년 두 차례 발표해오고 있는 환율 보고서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무역적자를 개선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이 때문에 1995년 역(逆)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의 달러 정책이 강세를 용인하는 방향('루빈 독트린'이라 부름)으로 바뀌었다.
2015년까지 이어졌던 이 시기에 달러 강세 용인으로 교역국 통화 가치의 평가절하가 문제되지 않음에 따라 환율 보고서는 무의미해졌고 무역적자가
다시 확대됐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이클 베넷, 오린 해치, 톰 카퍼 등 3인의 의원이 주도가 돼 '무역촉진법 2015' 중 교역국 환율에 관한 규정(BHC법)이 대폭 강화됐다.
BHC법에 따르면 △대미국 무역흑자 200억 달러 이상 △국내총생산(GDP)대비 경상흑자 3% 이상 △외환시장 개입이 지속적이며 그 비용이 GDP의 2% 넘는 요건 순으로
모두 충족하는 국가는 환율심층 대상국(종전의 환율 조작국), 두 가지 요건만 충족하는 국가는 환율관찰 대상국에 지정된다.
하지만 중국은 지정요건 하나만 걸려있다. 원칙적으로 한다면 지금의 환율관찰 대상국에서도 빠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지정요건을 완화하기 위해
검토하고 있는 것이 1988년 종합무역법이다. BHC법과 달리 △대규모 경상수지흑자 △유의미한 대미국 무역흑자 중 한 가지 요건만 결리면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될 수 있다.
종합무역법 지정요건이 부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트럼프 정부 들어 환율 보고서가 갈수록 다른 목적과 연계돼 악용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BHC 지정요건대로 운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트럼프 의지(Trump's volition)'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멕시코, 독일, 한국 등 주요 교역국의
고환율 정책에 따른 피해의식이 유난히 높다.
중국이 환율 조작국으로 걸리면 25%, 10% 보복관세 대결하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의 견제 없이 행정명령으로 발동되는 '슈퍼 301조'에
의해 100%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미국 수출이 막히는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1990년대 환율 조작국으로 걸렸던 교역국이 슈퍼 301조를 '전가의 보도'로 비유할 정도였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된 이후 중국이 쓸 수 있는 최후 카드는 미국 국채를 내다파는 일이다. 이런 징후는 중간선거 이전부터 감지됐다. 미국 재무부가 발표한 국가별
보유국채 현황을 보면 중국의 보유분은 지난 5월부터 감소되기 시작했다. 7월의 경우 77억 달러에 달해 한 달 매각액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한 나라가 미·중 간 마찰 등과 같은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정책수단이 소진됐을 때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last resort)
역할이다. 중국의 보유 국채분이 감소하기 시작한 때부터 미국 중앙은행(Fed)이 보유국채 매각속도를 높이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꾸준히 제기돼 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중 간 마찰이 무역전쟁을 넘어 미국 매각대결로 악화된다면 가장 우려되는 것이 미국 국채가격이 떨어지고 반비례 관계에 있는 국채금리가
급등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당사국인 중국은 국채가격 급락으로 자본 손실을, 미국은 금리상승으로 원리금 상환부담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채금리가 급등함에 따라 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융완화의 필요성을 여전히 느끼고 있는 각국의 중앙은행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금리체계(interest system)'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책금리(기준)를 인상해야 또 다른 부작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 중앙은행 총재는 '그린스펀 수수께끼(정책금리는 인상했는데 시장금리는 내리는 현상)'보다 '앨런 수수께끼'를 더 우려한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는데도 정책금리를
올리는 것은 성급한 출구전략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도 성급한 출구전략 추진으로 대공황을 낳게 한 '에클스 실수(Eccles's failure)'를 경험한 적이 있다.
투자자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금융위기 이후 거의 모든 투자자는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국채를 사들인 결과 과다 보유 상태다.
특히, 한국 투자자는 북한 문제에 따른 지정학적 위험,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 따른 정국혼란이 겹치면서 보유 국채를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다.
국별로는 중간 선거 이후 지난 10년 동안 늘어난 달러 부채 만기가 집중적으로 돌아오는 신흥국도 문제다. 지난 3월 미국 중앙은행(Fed)가 금리를 올린 이후
금리차와 환차익을 겨냥해 움직이는 캐리자금이 이탈되는 상황에서 미국 국채금리와 달러 가치가 더 올라갈 경우 달러 부채 원리금 상환부담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은 올해 안에 2000억 달러, 내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4000억 달러 이상 달러 부채 만기가 돌아온다. 지난 3월, 6월 회의에서
두 차례 금리를 올린 Fed는 9월과 12월 회의에서 추가적으로 금리를 올린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 외화사정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IMF의 모리스 골드스타인 지표와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이 활용하는 외환상환계수로 신흥국 금융위기 가능성을 점검해보면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터키, 파키스탄, 이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이 높게 나온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멕시코,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은 그 다음 위험국이다.
금융위기 발생 고위험국으로 분류되는 중남미 국가는 외채위기로 학습효과가 있는데다 미국과의 관계(베네수엘라 제외)도 비교적 괜찮다. 하지만 이란, 터키 등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거나 협조하지 않는 국가와, 중국에 편향적이거나 일대일로 계획에 과도하게 참여하는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이슬람 국가는 IMF의 구제금융 수혈이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IMF의 최대 의결권을 미국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흥국 금융위기가 지속될 경우 한국도 금리인상 문제를 놓고 논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리인상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시각의 가장 큰 이유는
'외자이탈 방지'다. 한국과 미국 간 금리가 0.75% 포인트(p) 역전된 캐리자금 이동 여건에서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올해 안에 최대 1%p까지 벌어져 대규모
외자이탈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금리를 동결해야 한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우리 경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1년 이상 추진해 왔지만 오히려 무너진 중산층까지
합류돼 더 두터워진 하위계층일수록 가계부채 부담이 크다. 이 상황에서 금리마저 올릴 경우 외환위기 때보다 거리로 내몰리는 신용 불량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미국과 중국 간 환율과 국채매각 대결은 당사국뿐만 아니라 신흥국, 각국 중앙은행 그리고 투자자 등 참가자 모두에게 손해를 보는 네거티브 게임이다.
'세계경제 주도권 다툼'이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이 게임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