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들어서자마자 '핑퐁 외교'로 상징되는 미·중 간 관계는 '커플링(coupling·동조화)'에서 출발했다. 올해 100세를 맞은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이끌었다. 닉슨의 방문 이후 베트남 종전이 선언된 데 이어 1979년에는 미·중 간 국교가 수립됐다.
국교 수립 이후 2012년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까지 미·중 관계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된다.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정치경제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개념은 중국을 포함한 비서구 국가를 글로벌화와 시장경제에 편입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략을 말한다.
미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중국의 대외경제정책 기조였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범인 독일을 포함한 유럽 부흥에 크게 기여한 '마샬 플랜의 중국판'이라 부를 정도로 중국이 성장하고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까지 대중국 편향으로 만들었다. 마치 '중국이 없으면 대외경제정책이나 기업경영전략이 실패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총소득(GNI)이 WTO 가입 직전 미국의 17% 수준에서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에는 55%로 3배 이상 높아졌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글로벌시대에 동참해 급성장한 것은 미국에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의 경쟁자로 키우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는 미·중 간 관계가 커플링에서 디커플링으로 변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는 계기가 됐다.
중국 중심의 세계경제질서인 팍스 시니카 야망을 꿈꾸었던 시진핑 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대외경제정책 기조를 '주동작위(主動作爲·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로 급선회했다. 구체적인 실천계획으로 일대일로, 위안화 국제화, 제조업 2025, 디지털 위안화 기축통화 구상 등 중국의 세력 확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순차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두 컨센서스 간 충돌이 정점에 이른 것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절의 대중국 견제전략인 '나비로 패러다임' 추진 때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시절부터 초강경 중국론자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미국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함무라비 법전식으로 중국을 철저하게 배제해 나가는 디커플링 전략을 추진했다.
디커플링 전략을 더 강화한 것이 3년 전 발생한 코로나19 사태였다. 디스토피아 위기의 첫 사례인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온 세계경제질서는 중국의 부상으로 약화된 'G-something' 체제를 더 강화해 각국 간 관계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무력화된 지 오래고 유엔(UN),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등과 같은 국제기구도 그 위상이 떨어지고 합의 사항을 위반할 때 제재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려고 하는 국가들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국제기구 축소론'과 '역할 재조정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는 캐치 플레이즈를 내걸고 도널드 트럼프 직전 정부에 의해 크게 손상됐던 세계경제질서를 복원시키기 위해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G0 체제가 더 강화돼 분권화 시대가 정착되는 분위기다.
엔데믹 시대에 예상되는 세계경제질서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 공존하는 '차이메리카' △미국과 중국이 경제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신냉전 2.0' △지역 혹은 국가별로 분화하는 '분권화' △모두 조화하는 '다자주의' △무정부 상태인 '서브 제로(sub zero)' 등의 다섯 가지 시나리오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미국과 중국 간 이해관계에 따라 '차이메리카'와 '신냉전 2.0'이 반복되는 커다란 줄기 속에 다른 국가는 자국 문제 해결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중층적 '분권화' 시나리오다. 이 경우 세계경제질서는 G7국가가 주도가 돼 구축해 놓은 글로벌스탠더드가 통하지 않으면서 미래 예측까지 어려운 '뉴 앱노멀 젤리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뉴 앱노멀 젤리형 세계경제질서는 종전의 스탠더드와 거버넌스에 내재돼 왔던 한계에서 비롯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탠더드와 지배구조를 주도해 왔던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발생했고, 각국이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한 코로나19 사태에도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음에 따라 주도국으로서의 위상과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다.
G0 시대에서는 어느 국가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경제발전단계를 높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뉴밀레니엄 시대 이후 G7 이외 새로운 중심국으로 부각될 것으로 기대됐던 브릭스 국가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인구와 부존자원 이외 다른 성장동인이 있어야 주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 로스토우(W. W. Rostow) 교수가 주장했던 '제2의 도약론'이다.
새롭게 거론되는 성장 동인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디지털 콘택트와 인공지능(AI) 추세가 앞당겨져 초연결 사회가 도래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중심축 국가(pivot state)'일수록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심축 국가란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국가와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시진핑 주석은 내수 위주의 '쌍순환' 전략과 세계가치사슬(GVC)의 중심지를 더 강화하는 '홍색 공급망' 전략을 동시에 추진해 중국 중심의 네트워크 체제를 구축하고, 바이든 정부는 G7 회의 등을 통해 트럼프 정부 때 훼손된 동맹국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복원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콘택트 초연결 시대에서는 미·중 간 마찰은 '디지털 통화전쟁'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미국보다 앞서 디지털 위안화를 도입한 중국은 법정통화로 공식 선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시진핑 주석은 디지털 위안화를 달러화를 대신할 제2의 기축통화가 구축될 때까지 주력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더이상 달러 패권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중국은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담했던 달러화 보유 구속, 즉 '달러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 경우 보유 달러화가 대거 출회되면서 달러 가치가 추가적으로 떨어지는 악순환 국면에 몰릴 수 있다.
민간 권력이 국가 권력까지 넘보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디지털 달러 도입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미국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단계에 몰리고 있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에는 레이얼 브레이너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주축이 돼 '디지털 달러화' 도입 계획을 추진해 왔다.
미국 국민의 화폐 생활도 빠르게 변하면서 현금 없는 사회가 닥치고 있다. 오히려 공식화폐인 법화(法貨·legal tender)를 갖고 있으면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은 "바보다"라고 조롱할 만큼 '현금의 저주'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현금의 저주란 5년 전 케네스 로코프 하버드대 교수가 쓴 <화폐의 종말>에서 처음 주장해 충격을 줬던 용어다.
대외적으로는 현실로 닥치고 있는 '트리핀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트리핀 딜레마란 코로나19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화를 계속 공급해야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달러 가치 하락으로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벨기에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의 주장이다.
Fed가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은 풀린 달러화를 환수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2015년 12월 금리인상 이후 추진한 출구전략 과정에서 입증됐듯이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논의되는 화폐개혁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장 선호했던 '금본위제 부활'이다. Fed가 달러화 공급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금값이 올랐던 것도 이 요인이 한몫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금 공급량 제한과 금 보유국에게 또 다른 특혜가 집중된다는 점에서 실행에 옮기기는 사실상 어렵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위안화 조기 정착을 계기로 '디지털 달러화' 도입을 앞당기는 방안이다. Fed는 디지털 통화 시대가 닥칠 것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대책반을 구성해 준비해 왔다. 디지털 위안화가 정착될 경우 '디지털 달러화'와 또 다른 형태의 기축통화 전쟁이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매각함에 따라 양국 간 마찰도 엔데믹 시대에는 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월평균 50억 달러를 매각해 오던 중국이 올해 들어서는 100억 달러대로 늘리면서 미국 국채보유분을 8천 500억 달러 내외로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장기적으로 5천억 달러 선까지 줄어나간다는 계획이다.
중국의 미국 국채 매각은 미국에게 충격이 의외로 클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3대 평가사 중의 하나인 유럽의 피치사가 미국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한 단계 강등시킬 정도로 재정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 수준에 도달한 상황에서 중국의 국채 매각은 곧바로 미국의 모라토리움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면에서도 부정적인 효과가 우려된다. 중국의 국채 매각으로 미국의 장기채 금리가 더 오르면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가는 데도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 저축률을 더 끌어올려 소비를 둔화시키는 '저축의 역설(saving's paradox)'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설비투자도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Fed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미국 국채 매각분을 추가적으로 늘릴 것에 대비해 디지털 달러화 도입 발표와 함께 무제한 양적완화를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T)'로 바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OT란 단기채를 매각한 대금으로 장기채를 매입해 중국의 미국 국채 매각에 따라 부담이 될 장기채 금리를 하락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대중국 경제'라는 관점에서 나바로 패러다임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 중국의 GNI는 미국의 75%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 등은 바이든 대통령의 연임을 가정해 집권 기간인 2027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시진핑 주석의 팍스 시니카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자신의 집권 기간 중 경제패권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대 굴욕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2년 동안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미·중 간 관계 개선에 다리를 놓았던 키신저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자 디커플링 전략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고 있다.
먼저 손을 내민 국가는 중국이다. 중앙아시아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랭경온(政冷經溫·정치 군사적으로 냉랭한 관계 속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 기류로 바뀌면서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잇달아 초청하고 있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 가려졌던 신워싱턴 컨센서스인 '설러번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과연 미·중 간 관계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 시대로 넘어가 대립에서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엔데믹 시대에 세계 경제와 증시를 비롯한 국제금융시장, 그리고 한국 경제의 앞날을 좌우할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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