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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의 출범과 스페인 군부 개혁
(2024년 10월 기사)

제2공화국의 출범과 스페인 군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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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0월 기사)
기고: IT지원팀 권형우 선임매니저
안녕하세요. 10월에 접어들면서 바람이 한결 가볍고 선선해지며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큰 일교차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져 자칫 건강을 해질 수 있으니 유의하면서 가을의 추억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에서는 스페인 제2공화국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급진적 변화 속 출범한 제2공화국

기본적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은 기존 부르봉 왕정을 부정하고 공화정을 내세우며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헌법부터 '스페인 공화국은 노동자의 공화국'임을 분명히 명시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기존 알폰소 13세가 이끌던 부르봉 왕정에서 특혜를 받았던 귀족층에 대한 특권 등이 폐지되었고, 스페인 국토회복전쟁(La Reconquista) 등을 통해 스페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가톨릭에 대한 개혁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공화정 정부는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이었는데 급진적인 제2공화국에서는 가톨릭이 국민들에게 악덕과 위선을 오랫동안 제공했다며 크게 제재하는 방향을 취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회 해산입니다. 16세기 예수회는 과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개혁과 자성을 촉구하며 일어선 조직입니다. 특히 창립의 주요 인물 대부분이 스페인 출신이었고, 실제로 북유럽과 달리 스페인에서 개신교 운동을 차단하고, 스페인이 가톨릭의 중심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었습니다.
가톨릭을 눈에 가시로 본 스페인 제2공화국은 모든 종교단체를 해산하는 데 목표를 두었으나 기존 보수 세력과 가톨릭이 반발하자, 그 중 예수회만 해산시키고 재산을 모두 국고에 귀속시켰습니다. 하지만 예수회 해산은 전통적인 종교 세력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보수 세력들의 불만을 자극했습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한편 두 번째로 제2공화국이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군부였습니다. 제2공화국 정부는 리프 전쟁에서 졸전을 거듭하며 알폰소 13세의 퇴위까지 이끌어낸 데다, 쿠데타까지 일으킨 전력이 있는 스페인 군부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일찍부터 제2공화국이 군부를 개혁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스페인 군부의 대부분 장교들은 사병과 달리 귀족 출신들이 많아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물론 장교들의 개인 성향도 있었고 공화국 정부에 협조적인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보수적인 색채에 대해서는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아프리카파의 존재입니다. 리프 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은 영관급 이상 장교들은 리프 전쟁에서의 공훈을 바탕으로 엘리트 의식을 강하게 가지게 됐고, 그들의 야심만만함은 소위 아프리카파라는 파벌을 형성하게 됩니다.

스페인 군부 개혁과 강등을 받아들인 프랑코

프랑코는 리프 전쟁 후 모로코에서 귀국, 스페인의 근대적인 사관학교인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됩니다. 이 육군사관학교는 기존 사관학교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보병학교, 기병학교 등으로 병과를 나눠서 사관 교육을 시키는 것이 대세였고, 실제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시도 사관학교 출신이지만 톨레도의 보병학교에서 교육 후 임관했습니다. 새로운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는 기존과 달리 보병, 기병 등 통합적인 교과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통합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프랑코는 초창기 딱히 공화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관학교 학생들을 모두 모아둔 자리에서 "우리는 공화국에 충성할 의무가 있다"고 훈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공화국이 수립된 뒤 수분이었던 알카라 자모라 역시 당시 젊은 장교였던 프랑코를 우려해 쿠데타 가능성을 비밀리에 조사시키기도 했는데, 당시 보고서도 "프랑코가 조국이 무정부주의에 빠진 상황이 아니라면 딱히 쿠데타를 일으킬 성격은 아니다" 정도로 돼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2공화국 전쟁장관이었던 마누엘 아사냐 디아스가 사관학교를 방문하게 된 때 터졌습니다. 생도들이 열렬히 프랑코를 추종하며 그의 카리스마에 경도된 것을 목격한 아사냐는 프랑코의 위험성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사냐는 군부 개혁안에 사관학교를 폐쇄안을 포함시키게 됩니다.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아사냐가 내세운 군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급료를 다 지불하는 조건으로 장교와 장성들의 전역, 16개 사령관 구를 8개 사단으로 대폭 축소했습니다. 아울러 중장 계급도 폐지했습니다. 둘째로 사병들의 의무 복무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해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새롭게 신설된 통합 육군사관학교를 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군부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전통적인 군부 세력의 반발을 부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이후 사관학교 폐쇄와 함께 해임된 프랑코는 고문관이라는 명예직을 받았으나 6개월간 실질적인 보직은 받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전쟁 영웅에서 고문관으로 강등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강등을 받아들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그 인고의 세월은 짧게 끝납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메인사진출처: ⓒBundesarchiv, Bild 102-11543,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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