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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불러온
1997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1)
(2018년 09월 기사)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불러온
1997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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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09월 기사)
기고: 디지털서비스팀 권형우 매니저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 1994년 채권대학살을 끝으로 3년 뒤, 1997년으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이 시기는 우리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IMF가 있었던 때이기도 하지요. 자, 과연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고정환율제 VS 변동환율제

먼저 아시아 금융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실 그 뜻은 이름에 다 나와 있습니다. 고정환율제는 말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환율이며, 변동환율제는 통화량의 변화, 금리의 변화, 무역수지 등의 변화에 의해 변동하는 환율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시점에서 1달러가 1,200원이라 합시다. 만약 10년 전에도, 1년 전에도, 오늘도, 앞으로도(!) 이 환율이 유지된다면 이는 고정환율제도입니다. 반면, 이것이 때때로 변동돼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다면 변동환율제라 할 수 있지요.

캐나다 동전 사진 사진 출처: ⓒearl53, morguefile(https://morguefile.com)

사실 요즘 고정환율제를 쓰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의 중간 정도의 형태인 페그제를 쓰는 홍콩이 있기는 하나,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변동환율제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변동환율제도를 택하고 있기에, 매일매일 바뀌는 환율을 신문이나 뉴스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지요. 물론 과거에는 고정환율제가 대단히 익숙한 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1944년 미국 뉴햄프셔 브레튼 우즈에서 열린 협정에서도 달러를 기반으로 한 고정환율제가 대세를 이루었지요.

미국 뉴햄프셔 브레튼 우즈 협정 사진 사진 출처: ⓒSromerobolivia,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 모두 각기 다른 장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통화 체제가 확실히 낫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대부분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금융 위기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도 화폐 루피 사진

1992년 영국과 헤지펀드 간의 파운드 전쟁

1997년에 태국 바트화가 유례없이 크게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1997년 6월~12월이었습니다. 바트화 하락에는 조지 소로스 등 국제 거물들이 이끄는 헤지펀드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헤지펀드(Hedge Fund)를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구제금융을 받게 된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헤지펀드였기 때문입니다.

태국인 사진

이 시기의 중심에는 1992년 영국 정부와의 '파운드 전쟁'에서 엄청난 명성과 동시에 악명을 떨치게 된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있습니다. 그는 이미 1992년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던 영국 정부에 대한 파운드 매도 공격으로 영국 중앙은행에 대규모 환차손을 입히게 했던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의 주역입니다.

조지 소로스 사진 사진 출처: ⓒNiccolò Caranti,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당시 영국은 독일 등과 함께 유럽통화제도(EMS)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유로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이 제도는 회원국의 통화에 대해 중심환율을 정한 뒤, 합의된 중심환율(1파운드=2.95 마르크)에서 상하 2.25%까지의 변동만을 허용하는 준고정환율제도입니다. 당시 영국과 이탈리아 등은 경제사정 등을 이유로 6% 변동까지 허용되었습니다.

한편, 독일 정부는 갓 통일된 동독의 경제부흥을 위해 파격적으로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일대일 교환을 해주고 경기부흥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요.

유로 화폐 사진

독일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고, ERM에 의해 독일과 환율이 연동된 유럽 각국도 금리를 모두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경기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다 보니 정작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영국은 더 큰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를 노리고 소로스가 이끄는 퀀텀 펀드는 영국 파운드에 대한 대규모 공매도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파운드를 공매도하여 마르크를 산 뒤 역외시장에서 파운드를 사서 갚는 방식인데, 이럴 경우 파운드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이익이 발생합니다.

환율이 계속 하락하기 시작하자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를 사들이면서 방어에 나서는 한편, 불경기 속에서도 금리를 올려 자금을 유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해 영국은 결국 고정환율제를 포기합니다. 그리하여 소로스는 '한 나라를 굴복시킨 사나이'라는 평가와 무수한 악명을 얻게 됩니다. 당시 환율 고수를 호언했던 존 메이저 총리도 이 사태로 물러나야 했지요.

태국 고정환율제도 하의 바트화의 몰락

태국 사원 사진

1997년, 태국 정부는 유례없는 불경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수출의존도가 컸던 태국 정부는 바트화 가치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동시에, 외자 의존도가 매우 높아 통화정책마저도 사용이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1996년 세계 3대 평가사 중 하나였던 무디스는 태국의 국채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취약성은 물론, 불경기, 아울러 고정환율제로 인해 높은 수준의 가치를 갖는 바트화 특성으로 인해 곧 투기 세력의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태국 용 동상 사진

하지만 태국 정부는 이러한 투기공격에 대한 우려에 무감각한 편이었습니다. 실제로 1994년 멕시코 사태 이후로 지나친 외자 유치 등이 문제로 지적됐음에도 태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인 1992년, 영국의 중앙은행을 굴복시켰던 소로스가 이끄는 환 투기 세력이 태국에 입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됩니다!

댓글목록

이정문님의 댓글

이정문

태국에 의한  범 아사아지역에서의  변동환율제에의한  일부 투기세력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동남아의 경제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쑥대밭이 되었죠  외환고갈과  수츨에의한  외화벌이에는 한계가있고  수입및  외채는 늘어  상환할방법이없어  손을 들고마는 아주처참한 상태가되고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