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바로가기 본문 내용 바로가기

미래에셋증권 홈페이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배경은?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의 영향
(2019년 10월 기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배경은?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의 영향
메인 이미지 보이기
  • 처음 >
  • 투자 이야기 >
  • 쉽고 재미있는 투자의 역사
    (2019년 10월 기사)
기고: IT기획팀 권형우 선임매니저

2008년 이전에 서서

엔론 위기가 미국 한 곳에 큰 파급효과를 준 사건이었다면, 이번에 살펴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말 그대로 전 세계(Global)에 영향을 준 큰 사건이었습니다. 혹자는 전 세계를 혼란 속으로 빠뜨렸던 1930년대 대공황이나 혹은 1970년대~1980년대 오일쇼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2008년부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제로금리(기준금리가 '0'인 상황)입니다. '금리를 더 높여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지난해 큰 논란이 일었고, 지금도 금리의 추가 인상 여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제로금리가 처음 도입된 것이 바로 2008년 12월부터였고, 그 목적은 '글로벌 금융위기 진화를 위해서'였습니다. 무려 8년이나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MCI WORLDCOM 로고

그렇다면 왜 갑자기 2008년 거대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전 세계 경제를 강타 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러 배경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은 여타 금융위기들이 그랬듯이 일시에 쌓였던 버블이 한 번에 무너지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증권가 대부분의 금융위기들은 이 버블의 붕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에 큰 타격을 입혔던 튤립 사태나 18세기 영국을 뒤흔든 남해회사 사건, 1930년대 대공황과 2000년대 초 IT 버블 사태 등이 그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버블이 생겼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자유화와 규제 철폐의 시기

사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쌓였던 거품이 한 번에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모든 원흉이다'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우선 금융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전 세계적인 자본자유화라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자본이동이 자유롭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는 외국의 투자자들이 개발도상국에 투자하는 것에 법적 제약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런 규제가 슬슬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동시에 금융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규제 해제가 진행됩니다. 대표적으로 대출이나 예금 업무, 어려운 말로 여신 업무와 수신 업무만 담당하던 은행들이 조금씩 증권과 보험 등의 업무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을려고 하는 사진

이러한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클린턴 행정부에서 진행된 1999년 글래스스티걸 법안 폐지입니다.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의 공식 명칭은 1933년 제정된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을 발의한 글래스 의원과 스티걸 의원의 이름이 붙은 명칭이 더 유명해 글래스스티걸 법안으로 통칭되었습니다.

이 법안의 초점은 1932년 미국을 초토화시켰던 대공황입니다. 당시 대공황의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행들이 너무 방만하게 경영을 해왔고 이에 대한 규제 장치가 없었다는 지적이 문제로 떠오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20년대 미국에서 증권 붐이 일어나면서 너도 나도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보다 차라리 주식을 발행하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 수익이 감소합니다.

문제는 이 와중에서 금융완화 정책이 진행되면서 대출과 반대로 은행의 예금은 증가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행들도 증권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은행들도 적극적으로 증권투자에 나섰는데 1932년 대공황이 오면서 은행들이 도산하고, 예금자들이 예금을 손실 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에 글래스스티걸 법안이 통과되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분리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피켓들고 시위하는 사진

상업은행은 말 그대로 예금과 대출, 수신과 여신 업무를 하는 은행을 말합니다. 반대로 투자은행은 자기가 직접 투자를 하고 그 손익을 그대로 떠안는 업무를 진행하는 은행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업무는 기업인수나 합병, 증권 인수 및 자문 등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의 은행은 JP모건이 있는데, JP모건은 상업은행이면서 동시에 투자은행을 겸업했습니다.

JP모건의 창업자인 JP모건은 은행가였지만 동시에 시장의 '큰손'으로 통했는데 그는 일찍이 카네기로부터 US스틸을 인수했고, 발명가 에디슨이 창업한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와 엘리후 톰슨의 톰슨-휴스턴 일렉트릭 컴퍼니를 합병시켜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전신전화 회사를 모두 인수해 초대형 독점회사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의 거대 통신기업으로 유명한 AT&T입니다.

어쨌든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안 이후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는 분리되었고, 1934년 6월부터 은행들은 상업은행 업무와 투자은행 업무를 분리합니다. 여담으로 JP모건에서도 투자은행 업무를 분리, 투자은행은 모건스탠리(JP모건의 손자였던 헨리 모건 3세와 헤롤드 스탠리가 창업)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밖에도 글래스스티걸법은 연방예금보험제도 창설, 예금금리 상한 설정, 연방준비제도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사진

1986년 글래스스티걸법에 균열이 일어나다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금융이 자유화되고 1980년대부터 미국 은행들도 여러 업무에 조금씩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래스스티걸 법안이 걸림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때문에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둘러싼 1차 충돌이 벌어집니다.

이 때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은 유명한 폴 볼커로 당시 인플레이션의 투사이면서 동시에 '규제주의자'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볼커는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그대로 가져가길 원했는데, 법안의 해석을 두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위원들 간 논쟁이 벌어집니다.

1986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일부를 재해석하여 상업은행들이 투자은행 업무로 약간의 수익을 거둘 수 있도록 합니다. '총 수익의 5% 미만을 투자은행 업무로 거둘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에 고무된 은행들은 JP모건과 뱅커스트러스트(1999년 도이체방크에 합병되어 소멸)를 필두로 추가 완화를 요청하는데, 폴 볼커 의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대 2로 업무 완화가 통과됩니다. 이제 상업은행들은 기업어음(CP)이나 지방정부 채권, 모기지채권 등의 인수가 가능하게 됩니다.

폴 볼커가 물러나고 뒤를 이은 FRB 의장 앨런 그리스펀은 폴 볼커와 스탠스가 달랐습니다. 폴 볼커와 마찬가지로 장기집권 했지만 정책은 정반대로 보다 시장친화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 기간 동안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규제는 느슨해집니다.

회사원이 회의하는 사진

실제로 JP모건은 1990년대 매출의 10% 내에서 증권업을 인수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는데, 원래 초기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안은 상업은행들의 증권 인수가 원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규제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그 취지가 무색해집니다.

때문에 '차라리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여론이 있었고 법안 폐기가 꾸준히 시도됩니다. 실제로 규제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공화당은 상원을 통해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폐지하기 위한 시도를 꾸준히 진행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는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글래스스티걸 법안 실시 이후 60년간 독자의 고유 업무를 진행해온 증권사와 보험사들이 이를 수호하기 위해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민주당 내에서도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1999년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

하지만 규제 완화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1999년, 대부분 대형은행들은 산하에 투자은행과 트레이딩룸 등을 갖춘 전문 조직을 갖추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과 차관이었던 로런스 서머스 주도 하에 글래스스티걸 법안은 결국 폐지됩니다. 이는 당시 규제 혁파의 대상으로 월 스트리트의 환영을 받았지만 후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가뭄 사진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왜 왔는지에 대해 '얼간이 자본가들(Capitalist Fools)'이라는 글에서 이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를 중요한 원인으로 뽑았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에 따르면 글래스스티걸 법안이 폐지되면서 일반 상업은행들이 투자은행 업무를 겸업하게 됐는데, 이들이 기업의 증권 인수금융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니 투자금융뿐만 아니라 대출 등 일반 업무들도 투자은행 업무에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A은행이 B기업의 인수금융 등의 업무를 진행하며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B기업이 무너지면 은행의 손익에 감소할 수 있으므로, B기업을 살리기 위해 은행이 대출을 해주어 이 기업을 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B기업이 살아나 정상이 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A은행 역시 자칫하면 도산할 수도 있습니다.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지와 함께 클린턴 행정부에서 2008년 금융위기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주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장원미님의 댓글

장원미

투자금융뿐만 아니라 대출 등 일반 업무들도 투자은행 업무에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