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푸른 호랑이의 해 임인년, 새해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새해 계획을 세우신 분도 많으실 텐데, 연초라 이르기는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원하시는 바 이루시며 나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서독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시 장 모네와 로베르 쉬망의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 변화
이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독일에 대해 초창기 프랑스는 악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초창기 내각 수반이었던 샤를 드골은 제 5공화국 당시 대통령으로서 유럽 통합을 주도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독일에 대해 적개심이 있는 데다 그가 이끄는 우파 민족주의 정파 역시 독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보다 소련의 위험이 더 커지기 시작했고, 우파 민족주의 세력들이 선거에 패배하면서 미묘한 상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945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기존 우파 민족주의가 이끌던 임시정부가 사라지고 양원제와 내각제를 중심으로 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제4공화국은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서독에 대해 기존 우파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완화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제4공화국이 독일에 대해 100% 전향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자르 보호령' 문제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후 점령한 독일의 자를란트 지역을 '자르 보호령'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1947년에는 아예 이 보호령을 별도의 위성국가로 새로 만드려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실제로 1947년 프랑스 정부는 자를란트 지역에서 사용 가능한 '자르 프랑'이라는 별도 통화를 만들기도 하고, 자체 헌법과 외교부를 두는 등 별도의 국가로 만들고, 이를 관리하려고도 했습니다.
즉 제 4공화국 프랑스는 서독에 대해 일부 변화된 입장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입장
한편 서독에서는 1949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출범합니다.
철저하게 반공주의자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소련과 대립하는 한편, 서독이 서유럽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나치 부역자들 중 경중을 따져 처벌하는 한편, 단순 동조자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을 일부 포용하는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콘라트 아데나워는 프랑스에 대한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자르 보호령에 대한 프랑스의 위성국가화 움직임이 보이자, 독일 내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이를 쟁점화하기보다는 일부러 묵인하는 모습을 보여줘 한 때 야당인 독일 사민당으로부터 독일 총리가 아니라 연합국의 총리가 아니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콘라트 아데나워는 오히려 "독일이 변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서유럽 국가들을 안심시켜, 독일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며 자신을 향한 비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런 저자세를 취한 이유는 단 하나 '독일의 서유럽 편입'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르지만 독일은 기질적, 역사적으로 서유럽과 분리된 경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대 시기에도 독일은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과 달리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고,
나름 통일된 민족 국가를 오래 전에 이룬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근대에 민족 국가가 성립 됐을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국이 되긴 했지만 독일이 거둔 성취는 남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우리는 서유럽인들과 다르다"는 생각, 즉 '특수한 길(존더베크)'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은 남달랐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런 존더베크 사상을 극복하고 서유럽의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저자세로 나서 서유럽 국가들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책은 실제 효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 등에서는 초기에는 이를 독일의 영토 할량으로 메워야 한다는 강경론도 있었으나,
독일의 태도 변화에 여론이 바뀌는 등 일정 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1950년 4월 23일, 장 모네의 편지가 쉬망에게 전달되다
한편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서독이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경제 재건을 위해 점령한 독일 지역의 석탄을 포기할 수 없는 프랑스 입장은 여전히 서독-프랑스 간의 갈등요소였습니다.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쉬망 역시 이 고민을 어떻게 풀까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1950년 4월 23일, 로베르 쉬망은 시골 자택으로 휴가를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편지의 작성자는 장 모네.
바로 이 편지가 유럽 통합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