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19 확진자도 제법 많이 늘어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때문에 연말에도 바깥 대신 집에서 보내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모두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때가 오길 기다려봅니다.
지난 글에서는 전후 독일의 화폐개혁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독일의 화폐개혁 이후부터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련, 전격적으로 베를린을 봉쇄하다
화폐개혁 나흘 뒤, 소련은 전격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하고 있던 베를린 지역을 포위하는 강수를 둡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베를린의 상황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분할 점령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의 서쪽 지역을, 소련은 동쪽 지역을 점령하기로 합니다.
문제는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위치 상 독일의 동쪽 지역에 위치해 소련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나, 독일의 수도라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네 국가가 나눠서 지배하기로 했습니다.
때문에 베를린 내 미국, 영국, 프랑스 관할 지역(아래 서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한가운데에 존재한 섬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 지역이 매우 위험해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소련이 봉쇄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월부터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들을 멈춰 세우고 검문검속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1948년 6월 20일 화폐 개혁이 통과되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하고 18일부터
서베를린 도로를 봉쇄한 후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은 차량들만 도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6월 22일 소련 역시 독자적으로 동독 지역에 쓰일 화폐인 오스트마르크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24일, 한밤중에 서베를린으로 이어진 송전선을 모두 차단시키고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도로, 철도, 수로를 모두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개시합니다.
베를린 봉쇄의 해제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통해 소련의 우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서베를린을 점령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이미 한 번 전 세계적인 전쟁을 치른 마당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베를린을 회복하기 위해서 소련과 전쟁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봉쇄를 통해 강압적이지만 나름 피를 흘리지 않는 평화적 방법으로 베를린 지역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편 충격적인 봉쇄에 당황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예상과 달리, 서베를린 지역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군을 동원해 서베를린에 대한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진행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각지에서 공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수송기가 징발됐고 서베를린 지역에 식량 등 필수품이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1개월에 10만 톤이 넘는 물자가 항공기를 통해 투하되며 서베를린 지역에 공급이 이뤄지기 시작하자 소련은 당황했고, 결국 5월 12일 봉쇄를 풀게 됩니다.
베를린 봉쇄는 소련의 위험성을 유럽 국가들에게 널리 각인시켰고, 이는 서독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분열됐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점령지의 정치인들이 하나로 단결하게 되었고 비로소 서독이 탄생하게 됩니다.
한편 소련의 부상으로 독일을 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서독을 애초 평화로운 농업 국가로 만들 생각까지 했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는 전초기지적인 성격으로 서독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소련에 맞서기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재무장한 서독군은 미국의 지원 하에 소련 군대를 1차적으로 막아야 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서독의 탄생과 유럽의 정세 변화
서독이 탄생하면서 유럽의 지형도도 미묘해졌습니다.
자유주의 진영을 주도하게 된 미국은 과거 독일에게 피해를 입었던 여러 국가들(영국, 프랑스 등)이 독일에게 적대적으로 대응하기보다 화합하기를 원했습니다.
때문에 독일에 대해 강경책을 외치던 사람들 역시 의견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유럽의 역학적 변화는 유럽 통합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