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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의 얼을 담다
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
(2023년 03월 기사)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의 얼을 담다 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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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03월 기사)

너나할 것 없이 태극기를 보면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던 애국심이 번져 나오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민족의 얼이 고스란히 담긴 태극기. 역사 속에서 태극기는 나라사랑 그 자체로 표현되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항일의지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3·1절을 즈음해서 태극기, 그 중에서도 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를 짚어본다.

한국의 근대문화유산을 대표하는 태극기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1882년이다. 당시 미국과 수교를 하는 과정에서 국기 교환을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한 가지는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제작한 것이 최초의 태극기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태극기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빼놓을 수 없는 몇 가지 태극기가 있다. 바로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가 그것이다.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전 국민의 애국심을 끌어올린 구심점 역할을 한 태극기. 그래서 태극기를 대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결연하다. 데니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3건은 몇 해 전 보물로 지정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보물은 유형문화재 중 특히 중요한 것으로, 통상 제작·형성시기가 100년 이상 지난 문화재들이 지정된다. 근대문화유산 중 보존·활용가치가 커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유물 중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옛 태극기가 가진 역사적·학술적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들 태극기에는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상징성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벨기에 출신 샤를 메우스 신부에게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 선생은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려던 샤를 메우스 신부에게 태극기를 건네며 '미국에서 우리 동포를 만나면 자신이 쓴 글을 보여 주라'고 부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태극기는 도산 안창호 선생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해당 태극기는 제작시기와 전래 경위가 정확하고, 1942년 임시정부가 태극기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만들어져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특징을 가져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김구 선생의 친필 143자가 적혀 있어 역사적 가치도 남다르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사진출처: 문화재청

데니 태극기
데니 태극기

사진출처: 문화재청

'데니 태극기'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태극기로 1891년 본국으로 가져간 것을 1981년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다시 돌아왔다. 데니는 당시 국제 관례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이 외국과 불리한 통상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력한 외교관으로, 1888년 서구 국제법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혔다가 중국(당시 청나라)의 미움을 사 조선을 떠났다. 데니 태극기는 189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어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데니 태극기는 초창기 국기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면서 이를 지지한 미국 외교관 가문이 100여년간 간직하다 기증한 상호 호혜의 상징이란 점에서 가치가 크다. 가로 262㎝, 세로 182.5㎝로 옛 태극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관사 태극기1
진관사 태극기 사진(1)

사진출처: 문화재청

진관사 태극기2
진관사 태극기 사진(2)

사진출처: 문화재청

진관사 태극기3
진관사 태극기 사진(3)

사진출처: 문화재청

2009년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3·1 만세운동 시기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9년 발행됐던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 <조선독립신문> 등 독립신문류 19점도 태극기와 함께 발견됨으로써 이를 뒷받침한다. 3·1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 태극기는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이 숨기고 보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초월은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를 돕는 등 불교계 독립운동을 총괄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태극기라는 사실에 무게가 실린다. 태극기 자체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항일운동 상징성을 담고 있으며, 태극과 4괘를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를 의미하는 기존 견해와 달리 '자유와 평등'의 근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특징을 가진다.

댓글목록

최희숙님의 댓글

최희숙

우리나라의 과거와 아픔을 기억하고 후대에 그 정신을 잊지 않도록 전수 할 수 있기를...

이헌표님의 댓글

이헌표

올해 3.1절은 유난히 논쟁이 분분하네요.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입장이 어떤지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것은 독립운동가님들의 헌신과살신성인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아님의 댓글

이은아

3.1절의 위대함을 한번더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