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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망 플랜의 입안자, 로베르 쉬망
(2021년 11월 기사)

쉬망 플랜의 입안자, 로베르 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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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1월 기사)
기고: IT지원팀 권형우 선임매니저
이제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막 70%를 넘어서고 코로나 일상 회복이 논의될 정도로 '코로나19에서의 해방'이 조금 더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마시고 서로 삼가고 조심하며 코로나19 사태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장 모네에 이어 새로운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유럽연합과 유럽경제공동체의 초석을 다진 '쉬망 플랜'의 입안자인 로베르 쉬망입니다.

로베르 쉬망의 일생

로베르 쉬망은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가 맞닿아있는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입니다. 과거에 이 지역을 어느 국가의 영토로 보아야하는지가 늘 논란이 됐을 정도로 다소 역사가 복잡한 지역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알사스 로렌 지방은 분쟁을 거듭하다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 영토로 공식적으로 편입됐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독일과 밀접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경제권의 영향을 받으며, 언어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지역이 존재하는 등 일종의 '경계지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 피에르 쉬망은 알사스 로렌 출신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쉬망의 어머니는 룩셈부르크 출신이었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알사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 영토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쉬망은 독일 국적자가 됩니다. 이후 룩셈부르크 지역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독일 지역에서 신학과 법학 공부를 하며 법학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알사스 로렌 지방의 사람들도 독일 제국의 징집 대상이었지만, 쉬망은 건강상의 이유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전투부대가 아닌 로렌 지방의 관청에 배치되었고, 전쟁 기간 동안 대체복무를 하며 지내게 됩니다.
법봉 뒤 프랑스 국기 사진
1차 대전이 끝나자 알사스 로렌 지방은 독일에서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쉬망의 국적은 프랑스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자 알사스 로렌 지방이 독일 제국의 통치를 받던 시절에 적용되던 법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적용되고 있던 법을 모두 폐지하고 프랑스 법을 적용하자고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프랑스 정부도 난감하게 됩니다.
이 때 쉬망은 법 전문가로서 프랑스 법을 알사스 로렌 현지에 맞게 교정하고, 반대로 현지에 적용되던 독일 법을 프랑스식으로 수정해 적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덕분에 역량을 인정받은 쉬망은 1919년 프랑스 정치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프랑스 외무장관이 되다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패했고, 결국 친독일정권인 비시 프랑스 정부가 탄생합니다. 쉬망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고, 로렌 지방에 건너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 알사스 로렌 지방은 엄청난 혼란을 겪었습니다. 독일 나치 정권은 애초에 알사스 로렌 지방의 사람들은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다는 이유로 별도 징집을 하지 않았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알사스 로렌 지방도 징집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와중 알사스 로렌 지방 사람들은 자신의 민족적 뿌리를 독일에서 찾는 사람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뿌리를 프랑스에서 찾는 사람들은 로베르 쉬망처럼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는 등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로베르 쉬망은 정계에 복귀, 1948년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됩니다. 이 때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이 석탄업계에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제창하는 '쉬망 선언'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통합된 유럽을 위한 노력

사실 앞에서 장 모네의 움직임이 있었고, 프랑스 외에서도 하나된 유럽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6년 영국의 처칠은 유럽합중국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1946년 9월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유럽 각국이 하나의 '유럽 가족'이 되어 증오의 시대를 청산하고, 아울러 하나의 경제 체제를 만들 것을 역설했습니다. 아울러 여기서 1, 2차 세계대전 동안 서로에 대해 적대해왔던 프랑스와 독일이 파트너십을 먼저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처칠의 구상은 '독일에 대한 견제'를 앞세우고 있는 드골주의(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펼친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있었기에 이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럽통합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좌절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장 모네와 로베르 쉬망은 이런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만남을 지속하며 자신들의 뜻을 확고히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환경 변화가 찾아옵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모두 코로나19 조심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로베르 쉬망 사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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